영토의 고갈… '지하'는 도시의 미래다

허경주 입력 2022. 12. 24.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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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영토·물 부족 지하로 해결
국토 0.2% 늘어나는 효과
캐나다엔 대형 지하도시 2개 만들어
싱가포르 수자원공사(PUB)가 진행 중인 대심도 하수처리터널(DTSS) 건설 현장 모습. PUB 홈페이지 캡처

수백, 수천 년간 인류는 하늘을 동경해 왔다. 구약성서 창세기에 하늘에 닿는 바벨탑을 만들려다 신의 저주를 받는 얘기가 나오듯, 오래전부터 인간은 높은 곳을 향하고자 했다. 구름을 꿰뚫는 도심의 마천루들은 이 같은 욕망의 발현이다.

그러나 몇 해 전부터 많은 도시들은 땅속 세상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한때 ‘버려진 세계’로 여겨지던 지하가 좁은 영토, 변화무쌍한 기후의 대안이라고 여기면서다. “도시의 미래가 지하로 향하고 있다(미국 CNN방송)”는 말이 나올 정도다.


물 정화시설 지하로 보낸 싱가포르

22일(현지시간) CNN은 지하 개발에 나선 나라들을 소개했다. 사활을 걸고 있는 대표적인 곳은 도시국가 싱가포르다. 싱가포르 땅 밑 60m에서는 버려진 물을 정화해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 '대심도 하수처리터널(DTSS)' 건설이 한창이다. 48㎞ 길이 하수도 터널과 중수 처리시설을 만드는 1단계 작업은 2008년 완료됐다. 현재는 2026년 완공을 목표로 2단계 공사가 진행 중이다.

건설이 계획대로 모두 완료되면, 앞으로는 지상의 오·폐수가 약 200㎞에 달하는 터널을 통해 지하 처리장으로 옮겨진다. 현재 해당 작업을 하는 땅 위 용수 처리시설 규모가 150헥타르(ha)에 달하는 점을 감안하면, 전체 국토 면적(704㎢)의 0.2%를 추가로 이용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좁은 국토를 최대로 활용하기 위한 방책이다. 섬나라 싱가포르는 서울시 면적(605㎢)보다 조금 더 크다. 주요 시설을 지하로 넣어 공간 부족을 해소하는 셈이다.

싱가포르 수자원공사(PUB)가 진행 중인 대심도 하수처리터널(DTSS) 건설 현장에 놓인 터널보링머신(TBM) 모습. PUB 홈페이지 캡처

게다가 싱가포르는 대표적 물 부족 국가다. 수자원이 부족한 탓에 말레이시아로부터 상당량의 물을 수입하고 있는데, 넓은 지하 공간을 활용해 버려진 물을 모아 재사용할 경우 물 자급자족의 꿈에 한발 더 다가갈 수 있다. 결국 ‘영토’와 ‘물’이라는, 싱가포르에서 귀한 두 자원을 보존하기 위한 작업이란 의미다.

우 라이 린 DTSS 건설 수석 엔지니어는 “우리는 인구 증가와 산업 발전 문제에 직면해 있다”며 “늘어난 사람들로 인해 기존 폐수 인프라 확장에 계속 의존할 수 없어 지속가능한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고 말했다.

싱가포르에서 지하 개발이 새로운 일은 아니다. 산업 개발을 담당하는 주롱도시공사는 2010년대 서남단 주롱섬 지하 150m에 원유 비축기지 ‘주롱록캐번(JRC)’을 구축하기도 했다. CNN은 “싱가포르 정부는 올림픽 규모 수영장 600개와 맞먹는 규모인 거대한 지하동굴 JRC를 만들어 소중한 지상 공간을 확보했다”고 설명했다.


”몬트리올엔 2개의 도시 있다”

지하 세계에 관심을 갖는 건 영토가 작은 국가뿐만이 아니다. 무더위와 강추위를 피할 수 있는 지하의 특성을 눈여겨본 캐나다 역시 일찌감치 땅속 개발에 뛰어들었다.

캐나다 몬트리올 언더그라운드 시티 내부. 몬트리올 관광청 홈페이지 캡처

영하 30도까지 떨어지는 맹추위가 서너 달씩 이어지는 캐나다는 1966년부터 몬트리올에 대규모 지하도시 ‘언더그라운드 시티’ 건설에 나섰다. 여의도의 1.5배, 길이가 32㎞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큰 지하도시인 이곳에는 10개의 지하철역이 지난다. 200개 넘는 레스토랑과 2,000개의 상점도 들어와 있다. “몬트리올에는 지상과 지하로 나누어진 두 개의 도시가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토론토에도 27㎞에 달하는 지하 쇼핑몰 '패스'가 있다. 이곳을 지나는 지하철역만 5개로, 2개의 대형 백화점과 6개 호텔, 1,200여 개 상점이 입점해 있다. 두 곳 모두 자연의 악조건에도 쇼핑, 만남, 문화 활동 등이 가능하다. 기온이 인간의 생산성, 더 나아가 도시와 국가의 발전과 직결되는 점을 감안하면, 지하가 단순한 영토 확장 기념이 아닌 기후 변화 대응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멕시코 건축회사가 제안한 역피라미드형 건물 모습. 데일리메일 캡처·BNKR Arquitectura

멕시코에서도 2010년대 초 건축회사 BNKR가 65층 마천루를 지하에 거꾸로 박아 넣는 역피라미드 빌딩 ‘어스크래퍼’를 제안하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멕시코시티 고도 제한(최대 높이 8층)으로 건물을 위로 높이 올리지 못하자, 아예 땅 밑으로 깊게 들어가자는 ‘역발상’을 내놓은 것이다. 실현되진 못했지만, 많은 나라가 지하 공간 활용을 검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국 BBC는 “2050년까지 세계 인구 3분의 2가 도시에 살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도시의 땅은 점점 더 제한된 자원이 될 것”이라며 “자연적으로 지하와 어둠을 두려워하는 인간의 마음을 극복하는 데 지하 건물(도시) 성공이 달려 있다”고 설명했다.

허경주 기자 fairyhk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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