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러 용병집단에 무기 팔았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가 무기 부족으로 고전(苦戰) 중인 가운데 북한이 러시아에 대한 무기 지원에 나섰다고 미 백악관이 발표했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은 22일(현지 시각) 전화 브리핑에서 “북한이 최근 러시아의 민간 군사 기업인 ‘와그너(Wagner) 그룹’에 (보병용) 로켓과 미사일 등의 무기를 전달했다”고 밝혔다. 와그너 그룹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측근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설립한 용병(傭兵) 단체로, 세계 곳곳의 분쟁에 러시아군을 대신 개입해 ‘푸틴의 살인 용병’으로 불린다. 와그너 그룹은 우크라이나전에도 적극 개입, 최소 2만여 명의 전투원을 파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정부는 9월부터 여러 경로를 통해 “러시아가 부족한 탄약 등을 북한으로부터 조달하려 한다”고 경고해왔는데 북한 무기가 러시아 측에 인도된 것이 확인됐다고 밝힌 것은 처음이다.
커비 조정관은 “북한의 대러 무기 지원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결의 위반”이라며 “동맹 및 파트너 국가와 함께 안보리에서 북한의 대북 결의 위반 문제를 제기하겠다”고 밝혔다. 영국 정부도 백악관 발표 직후 “러시아에 북한의 무기 공급은 명백한 유엔 안보리 결의 위반”이라며 “러시아를 지원한 북한은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비판했다. 우리 외교부는 23일 “안보리 결의를 정면으로 위반해 국제사회의 평화와 안정을 해하는 북한과 와그너 그룹의 무기 거래 행위를 규탄한다”며 “안보리에 이 문제를 제기하겠다는 미국 측 계획을 지지하며 협력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북한 김정은 정권은 잇따른 미사일 도발과 핵(核)무기 개발로 이미 국제사회의 비난과 제재를 받고 있다. 이에 더해 유엔 안보리 결의를 위반해가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지원한 것으로 드러나 유럽은 물론 국제사회의 비판과 견제가 더욱 커질 전망이다.
이란에 이어 북한도 러시아에 대한 무기 지원에 나서면서 우크라이나 전쟁의 양상은 더욱 복잡하게 됐다. 지리적으로는 유럽 대륙 내에서 벌어지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서방 세계와 이에 반대하는 반(反)서방 세력 간의 국제전이라는 모양새가 더욱 확실해지고 있다.
일본 도쿄(東京)신문에 따르면 이 무기는 지난달 20일 북한 나선시 두만강역에서 열차 편으로 출발, 러시아 연해주 하산역을 통해 러시아 측에 인도됐다. 커비 조정관은 “북한이 와그너 그룹이 사용할 무기를 지난달 러시아 측에 전달했다”며 이 보도 내용을 확인했다. 미국은 인공위성을 통해 북한의 이 같은 움직임을 낱낱이 파악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북한이 추가로 군사 장비를 공급하는 것을 계획하고 있어 우려하고 있다”고도 했다. 이와 관련, 도쿄신문은 “앞으로 몇 주 내에 수천 발의 대전차 포탄, 대공 미사일 등을 포함한 군수 물자가 추가로 인도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북한이 러시아에 대해 무기를 공급할 가능성은 이미 수차례 제기돼 왔다. 미 국방부는 지난 9월 “러시아가 북측에 무기 수출을 요청하고 있다”고 밝혔는데 북한은 이를 부인했다. 백악관은 지난달에도 “북한이 러시아에 우크라이나 전쟁을 위해 상당한 양의 무기를 보내고 있다는 정보를 받고 있다”며 “다만 러시아가 탄약을 (실제로) 받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커비 조정관은 “북한의 러시아 무기 지원은 우크라이나 전황에 영향을 미칠 수준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워싱턴의 한 소식통은 “러시아와 이란이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무인기(드론) 공급을 통해 급격히 밀착했듯, 북한이 러시아에 무기를 공급하면서 양국 간 새로운 밀월 관계가 우려된다”며 “이 국가들이 ‘반(反) 서방 연합’을 구축하는 모양새를 (미 정부는) 가장 경계하고 있다”고 했다. 국제사회가 ‘반러’와 ‘반서방’으로 쪼개져 대립할수록 국제사회의 압박과 제재를 통해 종전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린다 토머스그린필드 주유엔 미국 대사는 성명을 통해 “와그너 그룹의 북한 무기 구매는 북한에 금지된 대량 살상 무기와 탄도미사일 추가 개발에 사용할 수 있는 자금을 대줘 한반도의 불안정에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했다.
북한 무기가 러시아군이 아닌 와그너 그룹에 공급된 것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와그너 그룹의 역할이 부쩍 커졌음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커비 조정관은 “러시아군이 전선 곳곳에서 고전하면서 푸틴 대통령이 와그너 그룹에 갈수록 더 의존하고 있다”고 했다. BBC는 이날 영국 정부 고위 관리를 인용해 “우크라이나에서 전투 중인 와그너 그룹 용병 숫자가 지난 수개월 새 1000명에서 2만명 수준으로 급증했다”며 “이는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 전체 병력의 10분의 1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와그너 그룹은 2014년 설립된 이래 전직 러시아군 출신 예비역 군인을 고용해 수천 명의 정예 병력을 운용해왔다. 시리아와 중앙 아프리카 등 러시아의 이권이 걸린 세계 각국의 분쟁에 러시아군 대신 개입해 전투를 벌여왔고, 이 과정에서 끔찍한 인권 침해와 전쟁 범죄를 일삼아 비난받고 있다. 최근에는 우크라이나 전장에 파병할 병력 충원을 위해 러시아 교도소에서 약 2만여 명의 죄수를 모병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편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이날 조선중앙통신 기자와 문답에서 “러시아에 군수 물자를 제공했다는 주장은 가장 황당무계한 여론 조작”이라며 “그 어떤 평가나 해석을 달 만한 가치조차 없다”고 주장했다. 또 “국제사회는 우크라이나에 각종 살인 무장 장비들을 대대적으로 들이미는 미국의 범죄적 행위에 초점을 집중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와그너 그룹도 “미국 정부의 발표는 소문과 억측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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