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빈자리 있습니까?
지금은 ‘빼박’ 그리스도인이지만, 어릴 때는 친구나 교회학교 선생님이 사정해야 겨우 교회 가는 신자였다. 하지만 성탄절 즈음에는 제 발로 갔다. 다들 교회에 모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탄 전야부터 교회에 동그랗게 모여 앉아 선물 교환이나 게임을 하며 성탄절을 기다렸다. 그때만큼은 교회에서 존재감이 없던 나에게도 동그란 원 한 곳을 허물어 자리를 내주었다. 나뿐 아니라 원은 나중에 오는 친구를 위해 자주 열렸고, 그때마다 동그라미는 커졌다. 어른이 된 지금도 성탄절 하면 그 ‘빈자리’가 생각난다.
그때 내가 경험한 빈자리는 환대의 의미였지만, 어떤 자리는 존재를 부정하는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최근 한 신학대학교에서 발행하는 신문의 일부가 공란으로 나왔다. 원래 그 자리에는 2018년 성소수자와 연대하는 의미에서 무지개색 옷을 맞춰 입고 학교 채플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징계당한 학생들이 학교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모두 승소했다는 소식이 실릴 예정이었다. 학교는 부당 징계로 학생들의 양심의 자유와 학습권을 침해한 것을 사과하는 대신, 그 소식을 알리고자 한 학내 언론을 탄압했다. 결국 신문은 공란으로 발행되고 말았다. 그런가하면 어떤 자리는 아예 없어지기도 한다.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위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출근길 투쟁에 서울시와 서울교통공사의 대답은 ‘무시’였다. 해당 역에 무정차 통과 조치를 한 것이다. 어느 공무원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장애인의 자리는 그렇게 무시되었다. 또 어떤 자리는 모욕과 혐오로 훼손되기도 한다. 이태원 참사 이후 제대로 된 애도조차 하지 못하게 희생자와 유가족의 존재를 서둘러 치우려는 정부에 대응하여 시민사회와 유가족이 만든 분향소 앞에는 모욕과 혐오의 말이 난무했다. 어느 유가족은 면전에 쏟아진 그 말들에 충격받고 실신했다. 이제라도 제대로 된 애도를 하겠다고 추스르고 만든 자리가 그렇게 훼손된 것이다.
세 장면은 각각 다른 상황이지만 누군가의 몫이어야 할 자리를 빼앗는다는 면에서 맥락을 같이한다. <사람, 장소, 환대>의 저자 김현경은 “어떤 보이지 않는 공동체 안에서 성원권을 갖는” 것을 사람의 중요한 요건으로 보았다. 즉 환대란 “사회 안에 있는 타자의 자리를 인정하는 행위”이며 “환대받음에 의해 우리는 사회의 구성원이 되고, 권리들에 대한 권리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 구절을 적용하자면, 사회 구성원 누구에게나 제 몫의 자리(권리)가 있고, 없던 자리라도 애써 만들어 환대하는 게 사회가 가져야 할 역량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거꾸로 있는 자리마저 없애거나, 쫓아내거나, 모욕하고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세 장면을 생각하며 그때 나에게 허락되었던 ‘빈자리’를 상기했다. 그 작은 원이 나에게는 ‘사회’의 모태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사회’가 ‘지금·여기’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마침 성탄절 전날이니 독자들에게 특별히 예수 출생의 비밀을 알리고자 한다. 성서에 기록된 예수의 출생지는 사실 베들레헴 여관의 허름한 마구간이다. 묵을 방이 없어 겨우 얻은 자리다.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가 누군가 기꺼이 내준 빈자리 덕분에 무사히 태어날 수 있었다. 그 ‘빈자리’의 의미를 되새기는 성탄절이기를.
오수경 자유기고가·<드라마의 말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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