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재앙 초래 ‘핵 버튼'은 대통령만 누른다?

박성준 2022. 12. 24.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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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타곤 문서' 폭로 美 군사정책 입안자
오경보 가능성·허술한 암호 확인절차 등
핵 지휘 통제·관리의 ‘불편한 진실' 고발
핵 단추 권한 전역 사령관에게도 위임
“北, 지도부 공격 땐 자동 발사 개발 중”

인류 종말 기계/대니얼 엘스버그/강미경 옮김/두레/2만3000원

“반세기 전 내가 알게 된 미국의 핵 계획 시스템과 병력 준비 상태 중 대부분의 측면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며, 여느 때처럼 재앙으로 치달을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이처럼 비윤리적이고 광기로 가득 찬 정책은 일찍이 없었다. 재앙을 일으키는 이러한 사태가 어떻게 생겨났으며 그런 위기가 반세기 넘게 존속해온 이유를 둘러싼 이야기는 광기에 관한 연대기나 다름없다.”

미국이 감추려 했던 베트남전의 추악한 진실을 폭로한 ‘펜타곤 문서’ 사건 주인공인 대니얼 엘스버그가 2017년 미국에서 발간한 책이다. 구조공학자의 아들로 태어난 소년이 하버드와 케임브리지를 거쳐 미 해병대 장교로 복무한 후 냉전 최전선에서 군사정책 입안자로서 활약한 일대기가 펼쳐진다. 엘스버그는 대체로 ‘펜타곤 문서’를 폭로한 인물로 유명하다. 하지만 군사·안보 분야에서 맹활약한 랜드연구소에서 오랫동안 미국 국가안보 시스템 최고 수준의 문제를 다루었다. 특히 그가 수행한 가장 중요한 일은 핵전쟁 정책 입안. 아이젠하워부터 닉슨 행정부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핵전쟁 계획을 세우고 점검했다.
대니얼 엘스버그/강미경 옮김/두레/2만3000원
북한과 미국이 핵전쟁 불사를 공언하던 시기에 세상에 나왔던 이 책이 국내 소개된 시점은 다시 세계적 핵 위험이 고조된 상황이다. 북한은 연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발사하고 남한에선 핵 무장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우크라이나에 밀리는 처지가 된 러시아의 핵 공격 가능성은 더 심각한 문제다. 부수적 피해를 극소화한 전술핵무기가 마치 ‘스마트’한 선택처럼 거론될 때도 있으나 이는 핵전쟁의 위험성과 본질을 간과한 소리다.

때맞춰 나온 신간은 ‘펜타곤 문서’ 폭로로 종신형을 살 뻔했던 엘스버그가 국가기밀 공개의 엄중함을 잘 알면서도, 또 수십년을 묵힌 다음에야 세상에 선보일 수 있었던 극도로 민감한 미국 핵전쟁 정책의 진실과 그 위험성을 담고 있다. 제1부에서는 미국 핵 지휘통제 및 관리의 허실을 밝힌다. 상존하는 오경보의 가능성, 복잡하면서도 허술한 암호 확인, 핵무기 사용 인가 권한의 위임, 너무도 광범위하고 불확실한 핵 공격 표적 등 절차적, 전술적 문제뿐 아니라 때로는 대통령에게까지 작전계획을 노출하려 하지 않는 군부의 지나친 비밀주의 등을 고발한다.

현장을 목격한 그가 전한 우리가 사는 세상의 핵 절멸 가능성은 소름 돋는다. 그린란드에 최초 배치된 핵 공격 탐지 레이더망을 몇몇 요인에게 소개할 때 벌어진 사태가 그렇다. “세계지도 위 숫자 1에 빨간 불이 들어오면 미확인 물체가 미국을 향해 비행하고 있다는 신호이고 가장 높은 위험 수위는 5로 미국이 공격받고 있다는 신호”라는 설명을 하는데 숫자판이 불이 들어오더니 곧 5에 도달했다. 핵전쟁 일촉즉발 상황인데 마침 흐루쇼프 소련 서기장이 유엔 회의 참석차 뉴욕에 있으니 소련이 핵 공격을 할 리 없다는 판단이 위기를 막았다. 레이더 신호가 노르웨이 하늘에 뜬 달빛에 산란돼 생긴 오경보였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1964)’는 오경보로 인해 핵 반격에 나선 미국 공군 전략폭격기 B-52가 통신 장비 고장으로 작전 취소 명령을 하달받지 못한 채 지구 멸망을 초래하는 핵전쟁을 일으킨다는 내용을 담은 블랙 코미디다. 영화의 여러 측면이 황당해 보일 수 있지만 1960년대 핵전쟁 정책 입안자로 일했던 대니얼 엘스버그는 “(블랙코미디가 아니라)다큐멘터리였다”며 “그 영화의 모든 것은 당시 운영 현실로 존재했다”고 증언한다. 미국 영화제작자협회 자료
1991년 주한미군 전술핵 철수가 이뤄지기 전 한반도가 얼마나 핵전쟁에 취약한 상태였는지도 실감 나게 적혀 있다. 잘못된 경보나 핵미사일 발사 지시를 받은 지휘관이 통신 두절 상태에서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 점검하고자 했던 엘스버그는 ‘군산’을 골랐다. 군으로부터 ‘어디든 날아가, 누구에게나 말을 걸고, 무엇이든 볼 수 있는’ 재량권을 부여받은 상태였다. “도쿄 근처의 모 사령부에서 지도를 보는데 남한에 있는 한 작은 공군기지가 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한국에서 핵 전투기가 있는 최북단 기지였다… 서울에 도착해 어렵게 경비행기를 수소문해 타고는 사람이 살지 않는 황량한 산지를 지나 군산으로 향했다… 기지를 책임지고 있는 장교는 공군 소령이었다. 그는 1.1메가톤 위력의 열핵무기 마크28을 탑재한 F-100 12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이 폭탄은 1개가 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이 유럽과 태평양을 비롯해 전 세계에 투하한 폭탄 톤수의 절반에 해당하는 폭발력을 지니고 있었다. 외딴 산지에서 조그만 반원형 막사와 비행기 12대를 책임지고 있는 소령이 2차 세계 대전 당시 화력의 6.5배를 지휘하는 셈이었다.”

막강한 핵전력을 지휘하는 소령에게 긴박한 상황에서 어찌 대처할지 묻자 그는 예민한 문제여서 윗선(도쿄) 허가 없이는 대답할 수 없다고 버텼다. 그래서 일본 사령부와 교신을 시도하는데, 실패했다. 이런 일이 얼마나 자주 발생하는지 묻자 핵 폭격기를 지휘하는 소령은 “하루에 한 번꼴로 일본과 연락이 두절된다”고 답했다. 이윽고 윗선 허가를 확인한 소령은 어떠한 경우에도 상부 지시 없이 출격할 수 없다는 원칙을 알면서도 막상 자신의 기지가 공격받는 상황이라면 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처럼 미국의 핵 단추를 누를 수 있는 사람은 대통령 한 사람이라는 공식적 입장과 다른 상황에 엘스버그는 경악한다. 실제로 핵 단추를 누르는 권한은 전쟁 임무를 수행하는 전역(戰域) 사령관에게까지도 위임되고 있었다.

2부에선 미국과 소련이 핵전쟁 발발에도 최후까지 살아남는 1인이 되기 위해 핵무기를 경쟁적으로 확충하며 어떤 인류 종말 기계를 고안했는지 고발한다. 미·소 양국의 전쟁 계획은 기본적으로 핵 전면전을 상정한 채 서로에 대한 참수 작전을 공언했지만, 권한 위임 여부에 대해선 부정하거나 모호한 답변으로 일관한다. 이러한 양국의 국방 정책의 결과가 핵전쟁이 발발했을 때 자동으로 핵무기가 발사되는 시스템, 즉 인류 종말 기계의 개발이다. 핵전쟁 발발을 막기 위한 지도부 제거 작전, 즉 참수 작전은 지도부가 공격당하면 자동으로 핵으로 반격하는 인류 종말 기계 개발로 이어졌고 이는 지금 북한에서도 벌어지고 있을 것이라는 게 핵전쟁 정책 전문가의 섬뜩한 예측이다.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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