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으려야 잊지 못할…그 여름의 열여덟살
아니 에르노 지음
백수린 옮김
레모
1958년의 여름. 수녀원 소속 기숙학교의 폐쇄적 환경과 부모의 과보호 아래 자라온 18세의 ‘아니’는 여름방학 캠프에 참가했다가 처음으로 ‘남자’를 마주한다. 가치관이 정립되기 전, 부딪히듯 맞닥뜨린 남성과의 첫 대면 이후 아니는 자신을 갉아먹고, 콩깍지가 단단히 씐 여름을 보낸다. 이후 아니는 ‘모든 것을 잊겠다고, 그에 대해 결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지만 시간이 흘러 결국 2013년, 그동안의 일기 속에 반복되는 ‘1958년 여자아이’를 찾아내는 사고의 여정을 떠난다.
이 소설은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 아니 에르노의 2016년 작품이다. 주인공 ‘아니 D.’를 열여덟부터 스물둘까지 집중해 그렸다. 평생 한켠에 묻어두었던,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첫 기억과 가장 아픈 상처를 꺼내 보일 용기를 응축한 소설이다. 작가는 대표작으로도 꼽히는 2000년작 『사건』에 나오는 25세 때를 설명하려면 18세로 돌아가야 한다는 결심에 이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사실상 ‘아니 에르노 세계관’의 첫 단추 격이다.
소설은 ‘첫 성경험’의 기록이 아니다. 청소년기부터 인간관계 지도에 대한 고찰, 이어지는 성장담에 가깝다. ‘충분히 매력적이지 않다’라거나 ‘식료품점의 딸’이라는 사실에 치여 대체로 움츠린 채 살아온 아니는 이후 단식과 폭식을 오가며 살을 빼고, 사범학교에 진학했다 그만두고, 영국으로 건너가 일을 하고, 유일한 친구를 떠나보내며, 점차 성장하고 확장한다. ‘그녀는 요부도 특이한 여자도 되고 싶지 않다’는 문장처럼, 대상으로서의 ‘여성’이 아닌 ‘사람’으로서 자아를 찾아 나가는 과정이 그려진다. 1인칭과 3인칭, 현재형과 과거 회상을 오가는 다층적 서술로, 내레이션으로 채워진 프랑스영화 같은 문장들을 소설가 백수린이 부드럽게 우리말로 옮겼다.
소설 속 붉은 노트에 적힌 시는 1958년 ‘그 소녀’의 마음을 짐작하게 한다. ‘나는 내 인생을 받았다 따귀 맞듯이 / 미지의 여자에게 휘파람을 불듯이 / 알지 못하면서 인생을 따라갔다’. (피에르 로아조) 아니 에르노는 ‘세상에서 행동하는 방법을 어떻게 모를 수 있는가’를 쓰고 싶었다고 적었다. 인생을 따귀 맞듯이 받은, 세상 물정 모르던 시기를 지난 모든 사람에게 가 닿을 법한 작품이다.
김정연 기자 kim.jeong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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