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인 듯 아닌 듯 현대적인 시
신준봉 2022. 12. 24. 00:22
김보람 지음
시인동네
어떤 페이지를 펼쳐도 마찬가지다. 젊은 시조시인 김보람의 새 시집 『이를테면 모르는 사람』에 실린 작품들을 시조의 형식 규격, 가령 3·4·3·4, 3·5·4·3의 음수율 안에 구겨 넣어 감상을 시도하는 순간 스텝이 꼬이게 된다. 시조 형식을 의식하는 만큼 정작 작품의 의미, 이미지와는 멀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반면 음보(音步) 분별을 그만두고 현대시, 자유시처럼 끊김 없이 읽어 내려가면 무언가 다르다. 그런데 김보람의 새로움은 그게 다가 아닌 것 같다. 단순히 행갈이·연갈이의 변형이 새로움의 전부는 아닌 듯하다.
‘0’이라는 ‘현대적인’ 제목의 작품을 보자. “계절의 자막을/ 끝내 읽지 못해도// 붉은 것은/ 붉은 것// 흔들리지 말자// 열에서/ 하나를 덜다/ 아홉을 파묻은 자리”.
전문이다. 메시지는 분명치 않다. “자막”을 ‘교훈’이나 ‘전언’쯤으로 읽으면, 계절 변화에 혹은 사랑의 생로병사에 아무리 둔감한 화자일망정 붉은색을 붉은색이 아니라고 우길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화자는 하나를 덜어내려다 무려 아홉을 잃은 사람이다. 그래서 0이라는 것일까. 중요한 건 이런 산수가 아니다.
김보람은 이를테면 시조인 듯 아닌 듯 현대시를 쓰는 사람이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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