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서 ‘체르노빌’까지, 우크라 비극을 예견하다

2022. 12. 24.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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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시네마 역사
올해 6월 27일(현지시간) 러시아군의 미사일 공격으로 파괴된 우크라이나 산업도시 크레멘 추크시의 쇼핑몰. 이날의 폭격으로 민간인 수십 명이 숨졌다. [AP=연합뉴스]
우크라이나에서의 총성이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긴 어둠의 터널로 빠져드는 것처럼 보인다. 소강상태다. 가장 두려운 전쟁은 끝이 보이지 않는 종류의 것이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아주 오래 전부터 앙숙의 관계였고 사실 그건 많은 영화나 문학 작품을 통해서 드러난 얘기였다. 우리가 배울 것은 다 초등학교 때 배웠다. 예전에 이것저것 다 진즉에 알았던 사실이라는 의미다. 그 조각의 퍼즐을 맞추지 못했을 뿐이다.

올드 팬 가운데는 우크라이나를 다룬 영화로 소피아 로렌,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 주연의 ‘해바라기’를 꼽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해바라기’는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의 거장 비토리오 데 시카가 1970년에 만든, 그 답지 않은 신파 전쟁 러브 스토리다. 이 영화가 우크라이나를 배경을 하고 있다는 설(說)은 순전히 해바라기 밭이 나오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 남녀는 2차 세계대전의 전쟁 통에 헤어졌고 여자는 남자를 찾아 우크라이나 땅을 헤매는데 그 노정에서 광활한 해바라기 밭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남자는 우크라이나를 넘어 러시아 땅으로 들어선 지 오래다. 그 과정은 이렇다.

해바라기 밭, 대형 쇼핑몰 들어섰다 파괴

① 해바라기(1970) ② 전함 포테킨(1925) ③ 미스터 존스(2019)
1941년 독일–이탈리아 연합군은 소련 침공에 나선다. 이른바 바르바로사 작전(붉은 수염 작전)이다. 이 가공하면서도 무모한 작전은 세 가지 노선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발트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땅을 경유해 북러시아를 침공, 레닌그라드에 다다르는 것이고 또 하나는 벨로루시 땅을 거쳐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마지막 하나가 바로 소련의 최대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를 점령한 후 남러시아를 완전 장악한다는 것이다. 이렇게만 되면 러시아는 파시스트들에 의해 완전히 남북으로 점령당하게 된다. 영화 ‘해바라기’의 주인공 안토니오(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는 남부 전선, 곧 우크라이나 전선으로 차출된 것이긴 하지만 연인 지오반나(소피아 로렌)의 추측과는 달리 이미 러시아 남부 전선으로 깊숙이 들어간 상태였다. 그녀가 남자를 찾게 되는 곳도 결국 남부 러시아의 어느 마을이다. 남자는 동토(凍土)의 땅에서 쓰러져 죽어가다 러시아 여자의 손에 의해 구조되고 기억상실증에 걸려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당연히 그 러시아 여자와 결혼까지 한 상태다. 어쨌든 이런 상황이니 영화 ‘해바라기’에서는 우크라이나가 잠시 스치듯 나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적어도 영화는 1950~60년대 전후(戰後)의 우크라이나가 여전히 곡창지대로서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영화 속 해바라기 밭 촬영은 우크라이나 폴타바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지난 6월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으로 대형 쇼핑몰이 파괴됐던 바로 그 지역이다. 이제 우크라이나의 해바라기 밭은 영화 ‘해바라기’에나 남아 있는 셈이 됐다. 현실의 해바라기 밭은 사라진 지 오래다.

아름답고 광활한 해바라기 밭의 전경이 숨어 있는 영화는 딱 한 편, 더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작품으로 리브 슈라이버(감독이자 배우, 나오미 왓츠의 전 남편)가 2005년에 만든 ‘우크라이나에서 온 편지(원제 Everything is illuminated)’이다. 미국 현대문단에서 저널리스트적 기법의 문학으로 명성을 얻어 온 조너선 사프런 포어의 원작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포어는 9.11 테러 이후를 다룬 가족 소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을 쓴 작가이기도 하다. ‘우크라이나에서 온 편지’는 그의 자전적인 소설인바 할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자신의 생물학적이면서도 존재론적인 정체성을 찾아 우크라이나 오데사를 여행하는 한 청년 (일라이저 우드)의 이야기를 그린다. 주인공은, 지금은 지명에서 사라진 ‘트라침브로드’라는 마을(지금의 헤르손 지역, 소피예우카 정도)을 찾아 헤맨다. 놀랍게도 이 영화는 우크라이나에서 조차 유대인에 대한 대량 학살이 있었음을 밝힌다. 그리고 더욱 더 놀랍게도 그 비극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해바라기 광야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존재해 오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 콘트라스트(contrast)의 의미가 매우 인상적인 작품이다. 삶은 유한하지만 동시에 무한하며 그렇기 때문에 비극적이되 아름답고 찬란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영화 ‘우크라이나에서 온 편지’는 우크라이나를 가장 아름답고 서정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그래픽=양유정 yang.yujeong@joongang.co.kr
우크라이나가 영화에 등장한 것은 비토리오 데 시카 이전, 리브 슈라이버라면 더더욱 훨씬 이전, 모든 세계 영화인들이 필견해야 할 영화로 꼽히는 작품에서 시작됐다. 소련의 거장이자 몽타주 기법(별도의 짧은 쇼트를 연결해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 내는 방법. 일종의 변증법적 편집 방식을 의미한다)의 창시자인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그 유명한 영화 ‘전함 포템킨’이 바로 그것이다. 배경은 우크라이나 최남단 항구 도시 오데사이다. 영화는 항구에 정착 중인 러시아 흑해 함대 전함 포템킨에서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킨 사건과 그 의미를 그린다. 오데사의 반란은 1905년의 일이고 이 사건을 기점으로 러시아 1차 혁명이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에는 그 유명한 오데사의 계단 씬이 나오는데 반란을 일으킨 포템킨 전함의 수병들을 향해 환호하던 시민들이 러시아 기마병들에게 무참하게 학살당하는 장면이다. 모두 몽타주로 찍혔다. 당시 러시아 차르 체제의 잔혹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바, 소련 공산당은 이 사건이 사회주의 혁명의 명분이었음을 보여 주기 위해 에이젠슈타인을 통해 영화로 남긴 것이다. 그렇다면 소련 공산당은 초창기 때만큼은 우크라이나를 사회주의 혁명의 시원지로 여기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그 안에도 비극의 단초는 있다. 영화 속에서 오데사 민중을 학살하는 기병은 바로 코사크(카자흐)들이다. 코사크는 용맹하기 이를 데 없는 기마 부족으로 우크라이나 돈강 유역에 집단으로 거주하되 대체로 러시아 황제의 근위병으로 살아가며 차르 체제에 충성하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얘기를 다소 지나치게 변주해 그린 영화로 노년층들이 기억하는 작품은 율 브린너, 토니 커티스 주연의 ‘대장 부리바(1962년)’가 있다. 레닌의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1917년 이후에도 소련은 레닌과 트로츠키의 볼셰비키 적군(赤軍)과 반혁명 세력인 맨셰비키 백군(白軍)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는바 이때 코자크는 백군 세력에 가담했다. 이 과정의 얘기를 서정적인 시선으로 담아 낸 작품이 바로 미하일 솔로호프의 소설 ‘고요한 돈강’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처음엔 백군으로, 나중엔 적군으로, 그리고 또 다시 백군으로 싸운다. 주인공은 같은 코사크 민족의 여자로 정숙한 아내와 러시아 유부녀 사이를 오가며 사랑을 나눈다. 이 위대한 대하소설은 다소 뒤늦은 2006년에야 루퍼트 에버렛, F. 머레이 에이브러함 등이 나오는 TV용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코사크 기병대, 오데사 계단의 시민 학살

그런 역사적 연유로 돈강 지역, 곧 지금의 돈바스 지역으로 소련 당국이 의도적으로(코사크같은 저항의 의지를 없애기 위해) 러시아 주민들을 이주시켰으며, 때문에 당연히 친러파들이 주류를 형성하고 우크라이나 내 민족주의 진영 및 친서방파와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명분이 돈바스 지역 내 도네츠크 및 루힌스크의 러시아 주민들을 보호한다는 것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돈바스와 코자크, 오데사의 계단과 전함 포템킨은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역사의 사슬로 연결돼 있다.

지금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구소련의 스탈린이 저지른 만행으로 철천지원수가 된지 오래다. 바로 홀로도모르(holodomor·대기근 학살) 사태다. 스탈린은 자신의 사회주의 제국을 완성하기 위해 세운 공업화 계획을 실현시킨다는 명분으로 우크라이나의 곡물을 강제 수탈, 해외로 수출하는데 1931년과 1932년 2년간 자행된 이 일로 우크라이나 인민 300만명이 아사한다. 성인들의 생식 능력 저하로 우크라이나의 인구는 1000만 명이 줄어들게 된다. 이 얘기를 다룬 영화가 바로 ‘미스터 존스’이며 폴란드의 유명 감독 아그네츠카 홀란드가 2019년에 만든 작품이다. 유명 스타인 바네사 커비가 소련 공산당을 옹호하면서도 내심으로 고민하는 기자로 나온다. 영화는 홀로도모르 사태의 전모를 취재하는 영국의 언론인 가렛 존스의 취재기를 그린다. 영화 속에서 (다소 뜬금없이 등장하는)작가 조지 오웰(조셉 마윌)은 몽상적 사회주의자답게 주인공인 존스(제임스 노튼)에게 “더 평등한 사회는 존재합니다. 완벽하지 않을 뿐이오. 기대를 너무 하면 안 됩니다. 실험에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니까. 누군가는 제대로 된 맥락에서 봐야 할 거요”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지 오웰은 이후 소련식 사회주의에 실망해 스탈린 독재를 비판하는 우화소설 ‘동물농장’을 쓴다. 영화는 조지 오웰의 복잡한 마음을 전한 셈인데 그건 감독 아그네츠카 홀란드의 심경이기도 하다.

우크라이나와 옛 소련의 불편한 관계를 알 수 있는 영화로는 ‘체르노빌’이라는 제목의 HBO 영화가 있다. 러시아에서 만든 ‘체르노빌 1986’보다 그냥 ‘체르노빌’이 낫다. 당시 소련이 이 원전 폭발사고를 어떻게 은폐하고 또 우크라이나 정부에게 떠넘기려 했는지가 드러난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어쩌면 오래 전부터 예정된 일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적어도 영화들을 모아 보면 그런 느낌이 든다. 영화는 늘 역사를 정리하면서 앞날을 예고한다. 이상한 예지력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ohdjin11@naver.com 연합뉴스·YTN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이후 영화주간지 ‘FILM2.0’ 창간, ‘씨네버스’ 편집장을 역임했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집행위원장,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컨텐츠필름마켓 위원장을 지냈다. 영화 번역가 달시 파켓과 2014년 들꽃영화상을 만들고 현재까지 운영. 『작은 것이 좋다』 『사랑은 혁명처럼 혁명은 영화처럼』 『당신은 영화를 믿지 않겠지만』 등 평론서와 에세이 『영화, 그곳에 가고 싶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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