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서 ‘체르노빌’까지, 우크라 비극을 예견하다
오동진의 시네마 역사
올드 팬 가운데는 우크라이나를 다룬 영화로 소피아 로렌,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 주연의 ‘해바라기’를 꼽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해바라기’는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의 거장 비토리오 데 시카가 1970년에 만든, 그 답지 않은 신파 전쟁 러브 스토리다. 이 영화가 우크라이나를 배경을 하고 있다는 설(說)은 순전히 해바라기 밭이 나오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 남녀는 2차 세계대전의 전쟁 통에 헤어졌고 여자는 남자를 찾아 우크라이나 땅을 헤매는데 그 노정에서 광활한 해바라기 밭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남자는 우크라이나를 넘어 러시아 땅으로 들어선 지 오래다. 그 과정은 이렇다.
해바라기 밭, 대형 쇼핑몰 들어섰다 파괴
아름답고 광활한 해바라기 밭의 전경이 숨어 있는 영화는 딱 한 편, 더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작품으로 리브 슈라이버(감독이자 배우, 나오미 왓츠의 전 남편)가 2005년에 만든 ‘우크라이나에서 온 편지(원제 Everything is illuminated)’이다. 미국 현대문단에서 저널리스트적 기법의 문학으로 명성을 얻어 온 조너선 사프런 포어의 원작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포어는 9.11 테러 이후를 다룬 가족 소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을 쓴 작가이기도 하다. ‘우크라이나에서 온 편지’는 그의 자전적인 소설인바 할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자신의 생물학적이면서도 존재론적인 정체성을 찾아 우크라이나 오데사를 여행하는 한 청년 (일라이저 우드)의 이야기를 그린다. 주인공은, 지금은 지명에서 사라진 ‘트라침브로드’라는 마을(지금의 헤르손 지역, 소피예우카 정도)을 찾아 헤맨다. 놀랍게도 이 영화는 우크라이나에서 조차 유대인에 대한 대량 학살이 있었음을 밝힌다. 그리고 더욱 더 놀랍게도 그 비극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해바라기 광야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존재해 오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 콘트라스트(contrast)의 의미가 매우 인상적인 작품이다. 삶은 유한하지만 동시에 무한하며 그렇기 때문에 비극적이되 아름답고 찬란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영화 ‘우크라이나에서 온 편지’는 우크라이나를 가장 아름답고 서정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그러나 그 안에도 비극의 단초는 있다. 영화 속에서 오데사 민중을 학살하는 기병은 바로 코사크(카자흐)들이다. 코사크는 용맹하기 이를 데 없는 기마 부족으로 우크라이나 돈강 유역에 집단으로 거주하되 대체로 러시아 황제의 근위병으로 살아가며 차르 체제에 충성하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얘기를 다소 지나치게 변주해 그린 영화로 노년층들이 기억하는 작품은 율 브린너, 토니 커티스 주연의 ‘대장 부리바(1962년)’가 있다. 레닌의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1917년 이후에도 소련은 레닌과 트로츠키의 볼셰비키 적군(赤軍)과 반혁명 세력인 맨셰비키 백군(白軍)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는바 이때 코자크는 백군 세력에 가담했다. 이 과정의 얘기를 서정적인 시선으로 담아 낸 작품이 바로 미하일 솔로호프의 소설 ‘고요한 돈강’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처음엔 백군으로, 나중엔 적군으로, 그리고 또 다시 백군으로 싸운다. 주인공은 같은 코사크 민족의 여자로 정숙한 아내와 러시아 유부녀 사이를 오가며 사랑을 나눈다. 이 위대한 대하소설은 다소 뒤늦은 2006년에야 루퍼트 에버렛, F. 머레이 에이브러함 등이 나오는 TV용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코사크 기병대, 오데사 계단의 시민 학살
그런 역사적 연유로 돈강 지역, 곧 지금의 돈바스 지역으로 소련 당국이 의도적으로(코사크같은 저항의 의지를 없애기 위해) 러시아 주민들을 이주시켰으며, 때문에 당연히 친러파들이 주류를 형성하고 우크라이나 내 민족주의 진영 및 친서방파와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명분이 돈바스 지역 내 도네츠크 및 루힌스크의 러시아 주민들을 보호한다는 것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돈바스와 코자크, 오데사의 계단과 전함 포템킨은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역사의 사슬로 연결돼 있다.
지금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구소련의 스탈린이 저지른 만행으로 철천지원수가 된지 오래다. 바로 홀로도모르(holodomor·대기근 학살) 사태다. 스탈린은 자신의 사회주의 제국을 완성하기 위해 세운 공업화 계획을 실현시킨다는 명분으로 우크라이나의 곡물을 강제 수탈, 해외로 수출하는데 1931년과 1932년 2년간 자행된 이 일로 우크라이나 인민 300만명이 아사한다. 성인들의 생식 능력 저하로 우크라이나의 인구는 1000만 명이 줄어들게 된다. 이 얘기를 다룬 영화가 바로 ‘미스터 존스’이며 폴란드의 유명 감독 아그네츠카 홀란드가 2019년에 만든 작품이다. 유명 스타인 바네사 커비가 소련 공산당을 옹호하면서도 내심으로 고민하는 기자로 나온다. 영화는 홀로도모르 사태의 전모를 취재하는 영국의 언론인 가렛 존스의 취재기를 그린다. 영화 속에서 (다소 뜬금없이 등장하는)작가 조지 오웰(조셉 마윌)은 몽상적 사회주의자답게 주인공인 존스(제임스 노튼)에게 “더 평등한 사회는 존재합니다. 완벽하지 않을 뿐이오. 기대를 너무 하면 안 됩니다. 실험에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니까. 누군가는 제대로 된 맥락에서 봐야 할 거요”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지 오웰은 이후 소련식 사회주의에 실망해 스탈린 독재를 비판하는 우화소설 ‘동물농장’을 쓴다. 영화는 조지 오웰의 복잡한 마음을 전한 셈인데 그건 감독 아그네츠카 홀란드의 심경이기도 하다.
우크라이나와 옛 소련의 불편한 관계를 알 수 있는 영화로는 ‘체르노빌’이라는 제목의 HBO 영화가 있다. 러시아에서 만든 ‘체르노빌 1986’보다 그냥 ‘체르노빌’이 낫다. 당시 소련이 이 원전 폭발사고를 어떻게 은폐하고 또 우크라이나 정부에게 떠넘기려 했는지가 드러난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어쩌면 오래 전부터 예정된 일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적어도 영화들을 모아 보면 그런 느낌이 든다. 영화는 늘 역사를 정리하면서 앞날을 예고한다. 이상한 예지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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