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4일 오후 전시수도 충칭(重慶), ‘연합국 중국 전구(戰區) 사령관’ 장제스(蔣介石·장개석)가 홍색수도 옌안(延安)의 마오쩌둥에게 보낼 전문을 직접 작성했다. “왜구가 투항했다. 영구적인 평화의 실현과 각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생을 충칭으로 초청해 함께 국가 대사를 의논코저 한다.” 반응이 없었다. 일주일 후 두 번째 전문을 보내자 답전이 왔다. “단결을 위해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 동지를 선발대로 파견하겠다.” 8월 23일 장제스가 보낸 세 번째 전문은 재촉장이나 다름없었다. “충칭에 온 저우언라이와 대화 나눴다. 마음이 놓인다. 선생과 함께 모든 문제를 신속히 해결하고자 한다. 영접에 만전을 기하겠다.”
충칭 간 마오 “장제스 위원장 만세”
그날 밤 마오쩌둥은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를 열었다. 작금의 상황을 장시간 발언했다. 간추려 소개한다. “항일 전쟁이 끝났다. 평화와 건설 단계에 진입했다. 현재 장제스에겐 유리한 점과 불리한 점이 있다. 불리한 점을 알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유리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장제스의 앞에는 우리가 구축한 강대한 해방구가 있다. 항일 전쟁에서 해방구의 공로를 마멸시킬 방법이 없다. 봉쇄도 불가능하다. 국민당 내부에는 모순이 많다. 인민이 요구하는 민주와 민생을 해결할 능력이 없다. 현재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영국, 미국, 소련이 필요로 하는 평화뿐이다. 인민은 평화를 요구하고, 우리도 평화를 갈구한다. 국민당도 내전을 주저한다.”
주지할 점도 강조했다. “장제스의 공산당 소멸 방침은 변한 적이 없다. 변할 수도 없다. 우리의 투쟁은 장기적이고 온갖 곡절을 겪어야 한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장담 못 한다.” 건의도 잊지 않았다. “저우언라이 동지가 충칭에 갔다. 이틀 후 돌아온다. 나는 더는 지체할 수 없다. 미국 대통령 특사와 함께 충칭에 가서 담판에 임하겠다. 구호를 평화, 민주, 단결로 바꿀 것을 건의한다.” 특유의 익살도 빠뜨리지 않았다. “지금 우리 앞에는 3종류의 과자가 있다. 큰 것은 버리고 가장 작은 것부터 취하자. 다음엔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것을 먹자.”
참석자들은 마오의 언변에 익숙했다. 큰 과자는 해방구, 작은 과자는 소련군이 일본 관동군의 무장을 해제시킨 동북(만주),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과자는 국민당 관할지역이라고 직감했다. 동북의 특수성도 거론했다. “만주국은 망했다. 동북은 무주공산이다. 중·소 조약으로 동북 3 성의 행정권은 국민당이 장악했다. 행정권은 중요하지 않다. 먼저 군대를 주둔시키는 사람이 임자다. 단정할 단계는 아니지만, 현재 우리 당은 군대 파견이 불가능하다. 간부 파견은 문제 될 것이 없다. 각 분야의 간부 천여 명을 동북에 파견해 소련군 철수에 대비해라. 항일전쟁 승리의 열매는 인민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장제스와 평화담판하며 시간 끄는 동안 전쟁을 준비하겠다는 의미였다.
8월 29일. 충칭에 도착한 마오쩌둥은 43일간 머무르며 명연기를 뽐냈다. “장제스 위원장 만세”를 시발로 가는 곳마다 평화와 민주, 단결을 노래했다. 10월 9일, ‘쌍10평화협정’ 체결 전날, 영국 기자와의 회견에서 이런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내가 충칭에 온 이유는 분명하다.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협정을 통해 내전을 피하는 것이 중국 인민과 정당의 이익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현재 중국은 평화로운 건국이 시급하다. 연합정부가 성립되면 중공은 장 위원장과의 합작에 진심진력(盡心盡力)할 준비가 되어있다. 쑨원(孫文·손문) 선생의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철저히 시행해 독립은 물론 자유롭고 부강한 신중국 건설에 매진하겠다.”
“리샹란 정중히 회유하되 강요 금물”
마오쩌둥이 충칭에서 세 치 혀끝과 두 발로 전쟁에 지친 중국인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동안, 옌안의 중공 지휘부는 마오의 지시 수행에 분주했다. 선양(瀋陽)의 ‘장쉐량(張學良·장학량) 고거(故居)’에 ‘중공 동북국’을 신설했다. 농부와 상인으로 변장한, 중공 직할 8로군의 동북행이 줄을 이었다. 동북 진입 후에는 농촌과 산간 지역으로 분산시켰다. 일찌감치 만주국 기관에 침투해있던 중공지하당원들도 기지개를 폈다. 연일 직원회의 열어 목청을 높였다. 욕설은 기본이고 난투극도 심심치 않았다. 리샹란(李香蘭·이향란)을 배출한, 중국 최대규모의 문화기관 만영(주식회사 만주영화협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격론 끝에 만영 간판 내리고 동영(東影)을 출범시켰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 암호 해독으로 명성을 떨친, 국민당 ‘중앙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군통)’은 동북의 동향에 촉각을 세웠다. 국민당은 동북에 기반이 약했다. 행방이 묘한 8로군의 종적과 문화기구에 잠입한 중공 지하당원의 명단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적합한 인물을 물색했다. 여배우에 관심이 많았던 군통국장 다이리(戴笠·대립)가 상하이 지사에 전문을 보냈다. “일본 난민 수용소에서 판결을 기다리는 리샹란을 접촉해라. 리샹란은 일본인이다. 정중히 회유하되 거절해도 강요는 금물이다.” 거미줄 같았던 리샹란의 목숨이 강철로 변할 징조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