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 공모전 심사제 역주행, 20조 공공건축판 다시 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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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화의 공간탐구생활
최근 공사비 20조원 규모(2020년 기준)의 공공건축판에 위기감이 돌고 있다. 국민 세금을 들여 한 해 수천채 씩 짓는데 명작은커녕 망작이 되기 일쑤인 공공건축물의 발주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해 만든 제도가 사실상 철회 위기에 놓이면서다. 수술대에 오른 것은 ‘심사위원 사전 공개 제도’다. 설계비 1억원 이상 되는 공공건축물을 지으려면 설계 공모전을 거쳐 당선작을 뽑아야 한다. 이 공모전을 투명하게 관리하기 위해 국토교통부는 2019년 심사위원 명단을 공모 시작과 동시에 공개하도록 의무화했다.
공공건축 ‘기회의 땅’ 된 파주
그래서 나온 것이 심사위원 사전 공개다. 공모전을 알리면서 심사위원 명단도 공개한다. ‘깜깜이 심사’가 아니라 공정하고 능력 있는 심사위원이 심사하니 믿고 작품을 내라는 취지다. 하지만 제도가 시행된 지 3년 만에 국토부는 심사위원 공개 시점을 응모작을 제출한 뒤로 바꾸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지난 10월 열린 한국토지주택공사(LH) 국정감사에서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강대식 의원(국민의힘)의 질의가 발단이 됐다.
강 의원은 국감에서 “건축설계 공모 과정에서 로비 수주가 심해 능력 있고 전문성 가진 건축사사무소가 아닌 학연·지연으로 로비전의 승자가 된다”며 “심사위원 명단을 공모 시점부터 공개하면서 공정성·투명성·전문성이 모두 후퇴했다”고 말했다. 심사위원을 처음부터 공개했더니 되레 로비 기간만 길어졌으니 철회하자는 주장이었다. 과연 그럴까. 파주시에서는 정반대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심사위원 사전 공개제도와 맞물려 변화가 시작됐다. 파주시는 2019년 총괄 건축가로 민간 전문가를 선임했고, 이를 뒷받침하는 부서로 공공건축건립추진단을 만들었다. 각 과에서 알음알음하던 공공건축 발주를 추진단에서 맡아 사전기획부터 심사위원단 구성, 당선작이 실제 건물로 지어지기까지 전 과정을 총괄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이기옥 총괄건축가(필립 종합건축사사무소 대표)는 “나도 공모전에 참가하고 싶을 만큼 실력 있고 신망 있는 심사위원단을 구성해 사전에 공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며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꾸준히 하다 보니 실력으로 대결할 수 있는 공모전이라는 입소문이 났고 건축가도, 심사에 잘 안 나서던 심사위원도 파주에 몰리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여전히 외면 받는 조달청 공모전
그 결과를 토대로 파주는 지난 10월 전국 지자체 최초로 공공건축문화제를 개최했다. 2019년 제도를 개편한 이후 실제로 지어진 공공건축물과 앞으로 지어질 공공건축물을 시민들과 함께 경험하는 축제 한마당이 펼쳐졌다. 잘 지은 공공건축물은 시민 모두의 자산이 된다. 우대성 파주시 공공건축가(오퍼스 건축사사무소 대표)는 “공모전이 끝나면 심사위원 평가를 해서 더 공정하고 실력 있는 사람들로 파주시의 심사위원 명단을 재정비해 나갔고, 그 결과 파주의 공공건축 공모전의 신뢰도가 높아질 수 있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심사위원을 사전에 공개해도 젊은 건축가들이 여전히 외면하는 공모전이 있다. 각 정부 기관의 공공건축 건립 프로젝트를 위탁 운영하는 조달청의 공모전이 대표적이다. 파주시처럼 전담하는 부서나 전문가가 없는 지자체나 공공기관의 경우 조달청에 공공건축 설계공모전을 맡긴다. 그런데 “조달청은 안 들어가는 판이 됐다. 형식적인 심사 절차와 심사위원이 문제”(전보림 건축가)라는 지적이 나온다. 최근 조달청과 화성시에서 열린 공모전의 결과를 살펴보자.
국립미술품수장보존센터 공모전 심사위원의 경우 조달청이 9명 중 7명을 선정했고, 2명은 국립현대미술관 추천으로 참석했다. 이날 국립현대미술관 추천으로 심사를 맡은 김인철 건축가(아르키움 대표)는 “발표자와 심사위원 간의 질의응답 시간을 통틀어 5분만 준데다가, 심사위원끼리 치열하게 토론해 당선작을 뽑아야 하는데 이를 이끌 심사위원장도 뽑지 않고 공무원이 심사위원 한 명씩 돌아가면서 하실 말씀 하라는 식으로 진행했다”며 “좋은 안을 뽑기 위한 심사가 아니라 행정절차에 지나지 않는 심사였다”고 덧붙였다. 이에 조달청 측은 “공평하게 하기 위해 공사금액별로 정한 시간대로 질의응답 시간을 진행하고, 토론하라고 해도 심사위원들이 잘 안 한다”고 말했다.
심사위원 구성 방식부터 바꿔야
그런데 지난달 4일 화성시 주최로 연 ‘매송 주민편익시설’(가칭) 공모전의 분위기는 정반대였다. 설계비 6억원(공사비 120억원)의 프로젝트였지만 124팀이 응모했고, 실제 작품도 43팀이 제출했다. 화성시도 파주시와 같은 총괄건축가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이승환 화성시 건축총괄계획가는 “화성시의 경우 건축상을 받았거나, 이전에 공모전에 당선돼 신망이 두터운 사람으로 심사위원 풀을 엄선해 꾸렸고, 로비를 받는다고 소문난 블랙리스트는 제외했다”고 말했다. 공모전에서 당선된 신호섭 건축가(신 아키텍츠 공동대표)는 “하나의 공모전에 참석하기 위해 최소 직원 두 명이 2~3개월가량 투입돼야 하는데 작은 아틀리에의 경우 심사위원 즉, 심판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신뢰가 담보되지 않는 ‘깜깜이 심사’에 뛰어드는 것은 부담이 크다”고 말했다.
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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