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곳곳 문화시설 벤치마킹, 미술관 등 운영에 큰 도움
[김동호 남기고 싶은 이야기] 타이거 사람들 〈23〉 미 국무부 초청 시찰
때마침 예술의전당·현대미술관 등 문화시설의 건립이 진행 중이었고 87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있어 가능한 한 많은 지역의 미술관·박물관·문화정책기구들을 집중적으로 방문하기로 했다. 그래서 건축가 김원·김석철, 화가 김종학 등 미국을 잘 아는 친지들로부터 꼭 방문할 문화시설에 관한 조언을 받고 미 대사관의 실무 책임자와 협의해 무리할 정도의 빡빡한 일정을 짰다.
84년 4월 17일 화요일 12시 50분, 김포공항을 출발, 미국방문의 길에 올라 14시 55분 일본 하네다 공항에 도착했는데 공항에서 4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미리 연락받고 보세구역까지 마중 나온 주일본 윤탁 문화원장과 함께 공항을 빠져나와 공항 인근에 새로 조성된 국립역사민속박물관을 방문했다. 전시과장의 안내를 받아 관람한 뒤 7시 15분에 출발하는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연수 중 죽마고우 고건, 차 몰고 마중도
초청기관인 미국공보원(USIA)·주미한국대사관·스미소니언박물관·국립예술기금(NEA)·의회도서관·국립미술관·허쉬혼미술관·국립자료기록원·국립우주박물관·국립역사박물관·국립초상화박물관 등을 돌아봤다. 그 방대함과 다양한 역할, 특히 이들 미술관과 박물관이 수행하고 있는 활발한 사회교육기능에 주목했다.
원로건축가 아이 엠 페이가 설계한 내셔널 갤러리 이스트 윙을 찾았을 때 외부와 내부공간이 모두 트라이앵글로 설계됐고 자연채광을 최대한 활용하되 작품이 손상되지 않도록 특수유리로 건조한 건축양식이 눈에 띄었다. 높은 현관 로비에 걸려있는 후안 미로의 대형 타피스트리와 천정에서 돌아가고 있는 알렉산데르 콜더의 모빌 작품이 관람객을 압도했다.
4월 24일 18시 45분 워싱턴을 출발, 19시 50분 보스턴에 도착했다. 공항에는 내무부장관 퇴임 뒤 하버드대에서 연수 중이던 죽마고우 고건이 직접 차를 몰고 마중 나왔고 다음 날 하버드를 방문했다.
방대한 아시아 관련 도서와 자료를 소장한 옌칭(燕京)도서관의 백린(白麟)씨를 만났다. 서울대 도서관에서 만난 적이 있는 그는 자료수집 부서의 책임을 지고 있었다. 중국 책 38만 권, 일본 책 20만 권보다 한국 책은 5만 권밖에 안 된다면서 한국 정부의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하다고 호소한다.
풀브라이트재단 초청으로 2년째 하버드에 와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의 강우방 학예연구관의 안내로 포그뮤지엄을 돌아봤다. 4월 26일 고건이 운전하는 차로 독립운동가 유길준 선생의 유물이 전시된 피바디박물관을 관람하고 오후 3시 셔틀비행기로 고건과 함께 다음 행선지인 뉴욕으로 갔다.
금요일인 4월 27일부터 5월 1일까지 5일간 나는 뉴욕의 많은 곳을 방문했다. 도미니카공화국의 예술마을 알토스 데 차봉의 예술감독 스태픈 캐플린을 만나 예술마을 조성과 운영에 관한 상세한 내용을 들었다. 그의 안내로 퇴락해 가던 방직공장 거리를 미술관 거리로 재생시킨 소호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독일의 표현주의 작품 중심의 현대미술작품들이 전시 중이었다.
뉴욕타워·스퀘어가든·월드트레이드센터 등 뉴욕 투어에 이어 링컨센터·메트로폴리탄박물관·휘트니 미술관 등 문화시설을 관람하고 관계자들과 의견을 나눴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서 아메리칸 발레의 ‘신데렐라’ 공연도 봤다. 육병국 사무관이 모는 차로 뉴욕에서 먼 곳에 있는 ‘스톰 킹 아트센터’를 묻고 물어 찾아갔다. 문 닫기 직전에 도착했지만 퇴근하려던 관장의 배려로 관람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전 세계에서 촉망받는 젊은 조각가들을 엄선, 초청해 몇 주간의 워크숍을 통해 자연환경에 맞는 조각품을 만들어 놓은 것이 오늘날 유명작가의 작품을 한곳에 전시할 수 있게 된 야외 조각공원이다. 야외미술관 조성에 벤치마킹할 만한 프로젝트다.
5월 1일 뉴욕에서 출발해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그린즈버러에 도착했다. 노스캐롤라이나는 미국의 대표적인 예술의 고장이다. 노스캐롤라이나예술위원회는 미국에서 최초로 설립된 위원회였고, 이곳 상공회의소는 도시 입구에 ‘살기 좋은 곳, 기업에도 최고’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모든 기업이 예술 활동 지원에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예를 들면 기업의 직원이 공연 관람 티켓을 가져오면 같은 금액을 보상해 준다.
주요 예술기관과 기업인들을 만나 그들의 활동상황을 청취했다. 윈스턴세일럼을 방문, 모라비안 원주민이 사는 올드 세일럼을 돌아보고 노스캐롤라이나 예술학교를 찾았다. 7학년에서 대학과정까지 교육하는 이 학교는 무용·연극·음악·영상·무대디자인 등 6개 과정에 실기 중심의 교육을 하고 있었다. 한국에도 이런 교육기관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9년 뒤 92년 이어령 장관께서 마련한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음악원 설립을 추진할 때 많은 도움이 됐다.
다음 방문지는 바로 전해인 82년에 개관한 플로리다 올랜도의 에프코트센터였다. 광대한 대지 위에 대기업들이 첨단 영상기법을 동원해 조성한 에너지관 등 ‘7개의 대형전시관’들이 관람객의 탄성을 자아낸다. 호수 주변으로 멕시코·중국·독일·이탈리아·미국·일본·모로코·프랑스·영국·캐나다 등 8개국이 국가마다 특징 있는 독립 전시관을 조성하고 홍보활동을 하고 있었다.
아쉽게도 한국관은 없었기에 귀국해서 확인하니 주최 측에서 상공부에 제안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무시했다고 한다. 귀국 뒤 관계부처에 건의한 결과 ‘한국관’이 추가로 조성될 수 있었다. 플로리다 올랜도에서 1박 뒤 시카고와 미시간 주의 칼라마주를 거처 미네소타 주의 미니애폴리스와 세인트폴로 갔다.
여장을 푼 뒤 미네소타의대 닐 골트 학장 댁에 초대받았다. 64세의 노 교수는 69년부터 2년간 서울의대에서 교환교수로 근무해 한국에 애정이 많았다. 부인이 요양 중이어서 직접 요리한 저녁을 함께했다. 미니애폴리스에서 2박 3일을 보내면서 세인트폴의 복합문화시설인 미네소타역사박물관, 미네소타국제센터, 랜드마크센터, 미네소타미술관, 오케스트라 홀, 미니애폴리스예술원 등 문화시설을 방문했고 거트릭 극장에서 연극을 관람했다.
건축·미술 등 폭넓은 관심 증폭시켜 줘
미네소타예술원과 예술위원회도 방문했고 미국 중서부의 최대 규모인 미네아폴리스미술관에 들린 뒤 마지막 기착지인 로스앤젤레스(LA)로 향했다. 도착한 다음 날인 일요일, 장호씨의 안내로 샌프란시스코와 LA 중간에 있는 허스트 성을 찾았다. 관광산업과 언론계의 대부였던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당대의 건축가와 조각가를 총동원, 조성한 미술관인데 호화로움의 극치를 보여줬다.
LA에 머문 5박 6일 동안 윤기병 문화원장, 장문익, 김류 문화관, 그리고 KBS 이길영, MBC 강영구 특파원의 안내로 때마침 LA 올림픽을 1년 앞두고 막바지 공사 중인 올림픽경기장과 프레스 센터 등을 돌아보았다. LA카운티미술관, 폴 게티 미술관 등도 살펴봤다. 특히 ‘한국관’ 조성에 따른 추가경비 등 당면문제들을 현지 점검 회의를 통해 해결해 주었고 LA 카운티 뮤지엄의 한국 전시물 보강, 문화공보부와 KBS가 추진 중인 KTE(Korea Television Enterprise)에 관한 현지 사정과 의견을 청취한 뒤 5월 15일 LA공항을 이륙했다. 일본 도쿄에 도착, 한국문화원을 방문해 윤탁 원장과 한국 문화재를 많이 소장하고 있는 구니오미베 부부를 만난 뒤 16일 귀국했다.
한 달간의 미국 시찰은 추진 중이던 독립기념관, 예술의 전당, 국립현대미술관, 국악당은 물론 나중에 조성한 종합촬영소, 부산 영화의 전당 등 문화시설의 기획, 조성 및 운영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건축과 미술에 관한 폭넓은 관심과 애정을 증폭시켜 준 귀중한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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