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인문정원] 올해 벅찬 순간이 몇 번 있었을까

2022. 12. 23.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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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모르는 이들의 도움 덕분
혼자보단 이웃과 더불어 살자

한 해가 끝나간다. 돌이켜보면 올해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황당한 일도 겪었다. 새 대통령이 선출되고 새 정부가 들어섰다. 핼러윈 축제에 나선 젊은이들이 압사당하는 참사를 겪었다. 재난은 느닷없이 방심한 순간에 덮치고, 내 이웃들이 괴로워하는 동안 슬픔은 내 존재의 가장 약한 데를 찢거나 해체한다. 나는 산소마스크 없이 에베레스트산 정상을 등반하지 못한 채로 한 해를 보냈다. 그렇다고 낙담하지는 않았다. 그러기엔 내 육신이 너무 늙어버렸다. 대신 나는 아침 밥 먹기 전 사과 한 알을 먹고, 오후에는 산책에 나선다. 한입 베어 문 사과가 아삭하고 씹히는 찰나 나는 살아있음의 기쁨을 오롯하게 느낀다.

누군가는 죽어 세상을 뜨고 누군가는 콧속으로 밀려든 메마른 공기에 놀라 울음을 터뜨리며 태어난다. 올여름에도 수박은 달고, 장호원 햇사레 복숭아와 캠벨 포도 몇 송이는 내 혀를 즐겁게 했다. 봄날엔 벚꽃 핀 나무 아래를 지나 동네 음식점에서 칼국수를 먹고 여름엔 콩국수를 먹었다. 가을쯤엔 코로나19 양성 확진자로 앓다가 급성 폐렴이 겹쳐 닷새나 입원 치료를 받았다. 지인들이 쾌유를 빌어주며 갖가지 보양식이나 과일 따위를 보냈다. 마흔 해 전 옛 시집이 오래 절판되었다가 복간되는 드문 행운도 있었다.
장석주 시인
모함이나 분쟁으로 경찰 조사를 받거나 기소를 당하는 불운도, 뼈가 부러져 살가죽을 찢고 튀어나오는 불의의 사고도 겪지 않았으니 퍽 다행이라 여긴다. 내가 잠자며 어지러운 꿈속을 헤맬 때 고양이들은 침대 한쪽에서 곤하게 잠이 들었다. 잔등을 쓰다듬으면 고양이는 잠결에도 골골송을 불렀다. 그 평탄한 날을 누리면서 책 몇 권을 읽고 글을 쓰며 여행을 다녀왔다. 기후 온난화로 꿀벌이 사라졌다는 불길한 소식에 낙담했지만 살아남은 꿀벌들이 힘을 내 채밀한 덕분에 몇 숟갈의 꿀을 삼킬 수 있었다.

우리는 기후재난으로 고통을 당하지만 세상의 어머니와 아버지들은 여전히 제 딸과 아들에게 힘껏 사랑을 쏟아붓는다. 용맹한 캣맘들의 부지런함으로 길냥이들은 굶주림을 면하고, 소방대원들은 화재 현장으로 달려가 불을 끄고 귀한 생명들을 구한다. 그들이 부지런히 일할 때 나는 이런저런 일과 생각을 씨줄과 날줄로 엮으며 일상을 직조한다. 그 일상에는 변화무쌍한 날씨와 밥 먹고 사랑하는 것, 직장에 출근하고 퇴근하는 일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내 들숨과 날숨은 순조롭고, 덕분에 인간관계나 밥벌이도 그럭저럭 원만했으니, 이만하면 콧노래라도 부를 만큼은 살 만했다고 할 수 있다.

일상이란 외부와 연결된 채로 이어지는 하나의 흐름이다. 나는 외부에서 자양분과 에너지를 빨아들여 신진대사를 하고, 잉여는 외부로 방출한다. 그게 원활하면 사람들은 건강하다고 말한다. 행복이 욕망과 현실 사이의 균형이라고? 그럴지도 모른다. 행복은 혈관 말단까지 전달되는 혈액처럼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간다. 행복은 동네 도서관에서 책을 한 아름 대출해 돌아오는 등의 일상 활동을 어려움 없이 수행하는 가운데 느끼는 충만한 감정의 흐름이고, 현실과 기대 사이의 균형이며, 벅찬 순간 감각적 전율을 누리는 일과 그 결이 다르지 않을 테다.

오늘이 어제보다 더 행복해지는 일은 혼자만의 노력과 의지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는 안다, 누구도 행복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이들의 도움과 선의가 없이는 불가능함을. 새벽 거리에서 쓰레기를 치우는 이들이 없다면 우리는 아침 거리에서 쾌적함을 누릴 수 없다. 누군가 밤새워 빵을 굽지 않는다면 크루아상을 삼키는 기쁨도 없을 테다. 우리는 남루한 현실을 살 만한 세상으로 바꾸려고 안 보이는 곳에서 애쓰는 이들의 노력과 노동에 고마워해야 한다. 내 생각에 행복은 생의 벅찬 순간 마음이 추는 왈츠다. 심장은 펄떡펄떡 뛰고 혈관을 도는 피들은 기쁨에 넘쳐 탄성을 지른다. 나는 행복이 생을 낭비하지 않고 잘 산 것에 대한 보상이라고 여긴다. 혼자 잘 먹고 잘살겠다는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이웃과 더불어 잘 살아야 한다. 나는 모르는 곳에 사는 이들과 함께 누리는 행복을 꿈꾸리라.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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