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월의쉼표] 커피 한 잔의 거리

2022. 12. 23.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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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에 한파까지 휘몰아친 날이었다.

아이를 기다리고 있을 뿐인데 무슨 잘못? 아니면 뭐 부탁할 거라도 있나? 학원 차가 금방 도착한다 해도 그 경비실에서 훤히 보일 터라 나는 길을 건넜다.

한잔 드릴까요?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믹스 커피 봉지와 종이컵이었다.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나는 손안의 커피를 일생의 영약이나 되는 듯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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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에 한파까지 휘몰아친 날이었다. 아이가 태권도 학원에서 돌아올 시간이 되어 학원 차가 정차하는 곳으로 나갔다. 도로 사정 탓인지 도착 시간을 십오 분이나 넘기고도 소식이 없었다. 추웠다. 사방이 트인 곳에 가만히 서 있으려니 정말 추웠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는데도 손가락이 곱아 감각이 없고, 마스크를 쓰고 있는데도 눈가를 후려치는 바람이 매서워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

그렇게 이십 분쯤 서 있었을까. 무슨 소리인가 들려 고개를 드니 길 건너 아파트 경비실에서 경비 아저씨가 이쪽으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주위를 돌아보았지만 반경 십 미터 안에 움직이는 개체라고는 나뿐이었다. 순간 그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이쪽으로 좀 와보세요!

저 아저씨가 나한테 무슨 볼일이 있나. 내가 뭔가 잘못해서 주의를 주려는 걸까. 아이를 기다리고 있을 뿐인데 무슨 잘못? 아니면 뭐 부탁할 거라도 있나? 학원 차가 금방 도착한다 해도 그 경비실에서 훤히 보일 터라 나는 길을 건넜다. 그가 손에 쥔 것을 흔들어 보이며 큰소리로 물었다. 한잔 드릴까요?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믹스 커피 봉지와 종이컵이었다.

아, 커피. 시각 정보만으로도 꽝꽝 얼어붙어 있던 몸이 스르르 녹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의사가 내시경 검사 후에 했던 당부가 떠올랐다. 커피는 안 됩니다. 하루 한 잔도 안 좋습니다. 특히 믹스 커피는 절대 안 됩니다. 하기야 의사의 당부가 아니어도 커피를 마시면 내 위가 어떤 식으로 맹렬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는지는 내가 제일 잘 알았다.

감사합니다! 손을 뻗어 종이컵을 받았다. 그가 자신의 컵에도 뜨거운 물을 받으며 말했다. 이 날씨에 길바닥에 가만히 서 있으니 얼마나 추워요? 그러다 병나지. 차가 왜 이리 늦나 짜증도 나고. 근데 사실 진짜 힘든 건 운전기사예요. 길이 나빠 늦는 건데 부모들이 항의 전화하지, 학원 원장이 잔소리하지. 이런 때일수록 서로 이해해줘야 하는데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의 마음이 미치는 거리는, 자신의 일터도 아닌 이웃 아파트 주민의 육체적 건강에 그치지 않고, 그 주민이 항의 전화를 할지도 모를 학원 차 운전기사의 심리적 안위에까지 뻗어 있었던 것이다.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나는 손안의 커피를 일생의 영약이나 되는 듯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한 기운이 순식간에 아주 깊이 멀리 아득하게 뻗어 나갔다.

김미월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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