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세상에 나쁘기만 한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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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오랜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주 연락하던 친구인데 한동안 연락이 뜸하기에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닌가 걱정스럽던 차였다(우리가 벌써 그런 걱정을 할 나이가 된 것이다). 전화를 받자마자 친구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라는 최근작이 대중의 관심을 받으면서 요즘 내 친구들 반응이 다 이렇다.
어느 날 친구들이 너 구례 내려가더니 인간 됐다, 라고 말하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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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때문에 구례로 온 지 12년째
이젠 문학적 자산으로 여기게 돼
정말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인생
며칠 전 오랜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랜만에. 자주 연락하던 친구인데 한동안 연락이 뜸하기에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닌가 걱정스럽던 차였다(우리가 벌써 그런 걱정을 할 나이가 된 것이다). 전화를 받자마자 친구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뭐 상이야 몇 개 더 받을 줄 알았지만.”
구례 내려간 지 십이 년째다. 처음 몇 년은 쉽지 않았다. 청탁도 줄고 강연 요청도 줄었다. 내 문학도 내 인생도 여기까지인가, 서글플 때도 있었다. 아마 엄마만 아니었다면 백 퍼센트 서울로 돌아갔을 것이다. 점점 늙어가는 엄마 때문에 꼼짝하지 못한 채 구례에 발 묶여 살았다. 지나고 보니 그 세월이 나를 키우고 살렸다.
나는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찾아왔던 사람들을 다시는 만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래서 크게 관심 갖지 않았다. 그런데 엄마를 모시고 있으니 그분들이 수시로 찾아온다. 처음엔 솔직히 귀찮기도 했다. 이야기야 들었지만 잘 알지도 못하는 분들과 시간을 보낸다는 게 성격상 쉽지 않았다. 게다가 그분들은 뭔가를 바리바리 들고 온다. 온갖 김치며 밑반찬, 간장, 된장, 고추장, 어떨 땐 삶아서 한 번 먹을 양만큼 비닐봉투에 꽁꽁 싸맨 시레기, 직접 농사 지은 참깨로 짠 참기름, 쌀, 여수 바다에서 직접 잡은 갈치까지, 받은 것이 하도 많아서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생긴 건 촌년이라도 마음만은 쌩콩한 서울 여자인 나는 받는 것도 괴로웠다. 저걸 다 어찌 갚아야 하나, 돈 못 벌던 시절에 명절이 돌아오면 아득하기도 했다.
어느 순간 궁금해졌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정작 정승이 죽으면 손님이 없다는데 내 부모는 어떻게 살았기에 저 많은 사람이 뭐라도 하나 더 먹이려고,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찾아보려고 하는 것일까? 생판 남인데?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그들이 주고받는, 조건 없는 베풂 속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스며든지도 몰랐다. 구례 살면서 그분들이 준 사랑이 빨치산의 딸로 살아오는 동안 쌓인 상처나 슬픔 같은 것까지 다 녹여낸 것도 그때는 몰랐다. 어느 날 친구들이 너 구례 내려가더니 인간 됐다, 라고 말하기 전까지는.
예전에는 싫은 것투성이였다. 속물도 싫고 아부꾼도 싫고 애교도 싫고 꿈 없이 사는 사람도 싫고 돈 자랑하는 사람도 싫었다. 그래서 내 옆에 그런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요즘은 그런 사람들과도 잘 논다. 속물은 남에게 폐 끼치지 않으려 열심히 살아온 사람이었고, 애교나 아부는 사람과의 관계를 매끄럽게 해주는 타협의 기술이었고, 꿈이 없는 게 아니라 꿈꾸지 못할 만큼 힘든 세월을 살아온 것이었고, 돈이라도 자랑할 수 있으니 괜찮게 살아온 사람이었다. 싫어도 어쩔 수 없이 견뎌온 구례에서의 생활이 내게 준 행복한 선물이다. 그러기에 세상에 나쁘기만 한 것은 없다.
빨치산의 딸이라는 내 이름 앞에 언제나 붙는 수식어도 마찬가지다. 어려서는 괴로웠다. 그러나 작가로서는 다른 사람과 달리 역사와 인간을 동시에 볼 수 있게 한 소중한 문학적 자산이다.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이 괴로운 시간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궁금해하면서 기다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드넓은 이해의 순간이 찾아올지, 고통이 돈으로 환산되어 돌아올지 모르는 일이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니까.
정지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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