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함’은 없어도…끝까지 싸울래, 백래시에 맞서서[플랫]
거리에서 캐럴이 흘러나오고 달력이 송년회 약속으로 채워지는 연말입니다.
플랫 레터에서는 입주자 여러분과 2022년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려 해요. 여러분들은 한 해를 떠나보내는 ‘연말 루틴’이 있으신가요? 내년에 쓸 다이어리를 산다거나, 사진이나 문서를 백업한다거나,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영화를 본다거나 하는 나름의 의식들이요.
저는 친한 친구들과 함께 ‘연말 결산’을 합니다. 거창한 것은 아니고요. 다 같이 둘러 앉아 올해의 영화, 올해의 책, 올해의 맛집, 올해의 잘한 일, 올해의 ○○○을 꼽아봅니다. 그런 다음엔 내년에 하고 싶은 것, 이루고 싶은 것들을 적어 봉투에 넣습니다. 올해가 벌써 4년째인데, 지난해 기록과 비교해보니 꽤 많은 변화가 있었더라고요. ‘뭐 한 것도 없이 한 해가 갔냐’는 회의감을 이기는데 기록만 한 게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플랫 연말 결산은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해봤는데요. ‘올 한 해 무슨 일이 있었지?’ 가물가물한 분들을 위해, 2022년 젠더뉴스를 월별로 정리해보려 해요. 사실 여성 인권의 측면에서 엄청난 진전이 있었다고 보기는 힘든 해였어요. 그럼에도 시간은 흐르고 싸움은 계속됩니다. 한 걸음 진전하고 두 걸음 퇴보하는 나날이지만 각자 자리에서 분투하는 여성들의 존재를 확인하며 위안을 얻어요.
그럼 플랫과 함께하는 2022년 연말 결산, 시작해볼까요?
겨울 : 1, 2월
아직 끝나지 않은 ‘스쿨미투’와
이대로 끝낼 수 없는 ‘김진숙들’
(1월) 플랫팀의 2022년은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로 시작되고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아요. 1월26일, 6070 여성의 생애를 노동의 관점에서 되돌아본 <명함> 기획 첫 화가 공개됐습니다. 중앙일간지 기획물로는 처음으로, 노인과 여성 이슈 모두에서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 중노년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어요. 이들의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엮는 텀블벅 펀딩 프로젝트도 함께 진행했는데요, 20여일 만에 목표금액을 1442% 초과 달성하는 등 독자 호응이 뜨거웠습니다.
‘스쿨미투’ 5년. 교실은 여전히 성차별과 백래시의 최전선입니다. 진명여고 한 학생이 보낸 군 위문편지 내용이 공개되자, 일부 누리꾼들이 해당 학생을 상대로 사이버불링에 나섰습니다. 폭력을 방관하는 교육 당국에 대한 비판에 더해, 여고생에게 ‘정서적 위로’를 강요하는 시대착오적 ‘위문 편지’ 관행도 도마에 올랐습니다.
(2월) 한진중공업 마지막 해고노동자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37년 만에 복직했습니다. 김 지도위원은 “이번 결정이 한 개인의 복직이 아니라 아직도 부당해고로 싸움을 이어나가는 노동자들이 복직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는데요.
2022년에도 ‘김진숙들’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봄 : 3, 4, 5월
혐오와 차별에 맞서는 건 ‘연대’
여혐정치에 일침 놓은 여성정치
(3월) 20대 대선은 어느 때보다 거셌던 백래시 속에 치러졌습니다. 국민의힘은 여성가족부 폐지, 성폭력 무고죄 처벌 강화 같은 안티페미니즘 공약을 ‘청년 정책’의 이름으로 연일 쏟아냈죠. 이에 위기감을 느낀 2030 여성들은 ‘추적단불꽃’ 박지현씨의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 캠프 합류를 기점으로 막판 결집합니다. 이는 역대 최소 표 차로 국민의힘 압승을 저지하는 결과로 이어지죠. 한편,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탈레반이 여성 교육권을 보장하겠다는 기존 약속을 뒤엎고 ‘여학생 등교 금지령’을 내리면서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4월) 노동·장애인 이동권 등 사회적 이슈에서 여성들의 존재감이 두드러진 한 달이었습니다. 임종린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파리바게뜨 지회장은 SPC의 사회적 합의 이행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시작했습니다. 파리바게뜨는 젊은 여성 노동자 비율이 높은 대표적인 사업장입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출근길 시위에 대한 비판 여론이 고조됐을 땐, 서로 다른 세 정당의 여성 국회의원들(김예지, 최혜영, 장혜영)이 힘을 합쳐 적극적인 중재에 나섰습니다. 전쟁 개시 두 달째, 우크라이나에서는 전시 성폭력을 고발한 여성들의 증언이 처음으로 나왔습니다.
(5월)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이 임기를 시작했습니다. 취임 전 ‘(문재인 정부가) 성인지 예산을 국방 예산 수준으로 증액했다’는 남초 커뮤니티발 가짜뉴스를 일간지 칼럼에 옮기기도 했던 그는 자신이 장관을 맡은 부처 폐지에 ‘동의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했습니다. 한편 페미니즘·성소수자·장애인·이주민 등 이슈에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 온 미디어스타트업 닷페이스는 창립 6년 만에 해산을 선언했습니다.
여름 : 6, 7, 8월
미 대법원, 임신중단권 판결 폐기
여전한, 그래도 진보하는 미디어
(6월) 박사방 피해자 A씨가 재판의 고통을 무릅쓰고 조주빈 일당에게 제기한 5000만원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처음으로 승소했습니다. 시민사회가 10여년 넘게 제정을 요구해 온 ‘가사근로자법’도 시행됐습니다. 가사노동자를 근로자로 인정하고 법정최저임금, 연차유급휴가 등을 보장하는 것이 법안의 주요 골자입니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임신중단을 헌법적 권리로 보호해 온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폐기해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이로 인해 임신중단이 금지된 주의 여성들은 최대 867km를 이동해 원정 수술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7월) 인하대 성폭력 사망 사건을 기점으로 언론의 성폭력 보도윤리 위반 문제가 또다시 불거졌습니다. 사건 초기 보도들은 피해자의 발견 당시 모습을 선정적·경쟁적으로 묘사해 2차 피해를 유발했습니다. 갈 길은 멀지만, 변화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플랫팀이 경향신문 데이터저널리즘팀 ‘다이브’와 함께 10대 일간지의 10년치 헤드라인을 분석한 결과, “노처녀는 사라졌고 베이글은 빵이 됐습니다.”
(8월) 여성가족부가 ‘버터나이프 크루’ 사업 전면 재검토를 선언했습니다. “페미니즘에 경도됐다”는 권성동 국민의힘 대표의 한마디에 정식 공모를 거쳐 예산까지 편성된 사업이 기약 없이 중단된 것입니다. 방송인 김신영씨는 고 송해씨의 뒤를 이어 KBS <전국노래자랑> 차기 MC로 깜짝 발탁되며 ‘뉴스 속보’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가을 : 9, 10, 11월
신당역 수놓은 추모의 포스트잇
전 세계로 퍼진 ‘히잡 시위’ 물결
(9월) ‘젠더 이슈’로 가장 뜨거웠던 한 달입니다. 경향신문 사건팀은 ‘엘 성착취 사건’ 공론화를 계기로 ‘n번방 이후’ 계속되는 디지털성착취 실태를 집중 조명했습니다. 스토킹처벌법 시행 1년을 앞두고, 신당역을 순찰하던 여성 직원이 전 직장 동료였던 스토킹범에게 피살당하는 사건도 벌어졌어요. 가해자 전주환은 9년형을 선고받았고, 서울교통공사는 허술했던 직원 보호 조치로 비판받았습니다. 신당역에는 고인을 추모하는 시민들의 포스트잇이 물결을 이뤘습니다.
‘이예람 특검팀’이 100일간의 활동 끝에 수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공군 성추행 피해자인 고 이예람 중사 유가족은 2차 가해 조사에서 일부 성과가 있었으나 군 부실 수사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긴 부족했다며 아쉬움을 드러냈습니다. 여성가족부는 비혼·동거 가구도 ‘가족’으로 인정하겠다는 기존 입장을 철회했습니다. 한편 이란에서는 마흐사 아미니라는 이름의 여성이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도덕경찰’에 체포됐다가 3일 뒤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분노한 여성들은 히잡을 불태우고 머리를 자르며 연대를 표했고, 이는 곧 전국적 반정부 시위로 확산했습니다.
(10월) 윤석열 정부가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고 대부분의 기능을 보건복지부 산하 인구가족양성평등본부로 이관한다는 정부조직법 개편안을 발표했습니다. 법무부는 스토킹처벌법 독소조항으로 지목된 ‘반의사불벌죄’ 폐지를 입법 예고했습니다. 여성단체의 강한 반발에도 이 조항 삽입을 고집했던 법무부는 신당역 사건 후에야 입장을 바꿨습니다.
(11월) 일회용 생리대 내 화학물질에 여성 건강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이 식품의약품안전처 조사로 공식 확인됐습니다. 2017년 여성환경연대의 최초 문제 제기 후 5년 만입니다. 바둑 기사 최정 9단이 여성 최초로 메이저 세계대회 결승에 진출하며, 30년 전 중국의 루이나이웨이의 4강 기록을 갈아치웠습니다. 미국 중간선거는 민주당의 예상 밖 선전으로 마무리됐습니다. 임신중지 이슈로 결집한 ‘여성들의 승리’라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겨울 : 12월
교육과정에서 사라진 ‘성평등’
겨울, 다시 학교에서 시작되다
(12월) 세종시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 일부가 교원평가에 여성 교사를 향한 성적 모욕글을 써 논란이 됐습니다. 피해 교사들은 가해 학생이 자수하고 스스로 반성할 기회를 줘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학교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공론화에 나섰습니다. 한편 교육부는 ‘성평등’ ‘성소수자’ ‘재생산권’ 등 용어를 대거 삭제한 ‘2022 개정 교육과정’을 국가 교육정책 심의·의결기구인 국가교육위원회에 상정했고 22일 확정 고시했습니다. 보수 기독교 단체들의 요구를 반영한 결과로, 학교 현장에서의 성평등 교육이 후퇴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습니다.
플랫팀이 준비한 연말 결산은 여기까지입니다. 올 한 해를 돌아보니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댓글로 입주자님들의 소회를 나눠주세요. 플랫팀이 놓친 사건을 알려주시는 것도 환영입니다.
뉴스레터로 먼저 읽어본 플랫 입주자들의 한마디
전주환 살인사건의 피해자 분께서 남기신 탄원서 내용을 보다가, 참 단단하고 용기 있는 분이란 걸 다시 느끼면서 눈물이 났어요. 플랫의 모든 기사들이 그래요. 무엇이 더 옳은지 알고 있고 그 방향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 앞서가는 사람들, 용기 있는 사람들을 보며 느끼는 벅참 같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 우리가 유관순 열사를, 안중근 의사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읽으며 목이 메이듯, 어느 날에는 모두가 여성혐오를 과거의 잔재로 여기고 이를 물리치기 위해 애쓴 사람들의 이름을 다 함께 기릴 것이라고 믿습니다. 좋은 기사들 감사합니다. 연말연시 잘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대부분은 후퇴하였다 느끼고 좌절했던 해입니다. 그래도 “베이글은 빵이 되었습니다”라는 익살스러운 비유에서 희망을 봅니다.
문자 그대로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여성 이슈별로 다시 돌아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큰일이 참 많았고, 좋은 기사도 너무 많았네요. 역시 너무 멋진 플랫이에요. 함께 고민하면서 나아가요.
심윤지 기자 sharpsim@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단독] 강혜경 “명태균, 허경영 지지율 올려 이재명 공격 계획”
- “아들이 이제 비자 받아 잘 살아보려 했는데 하루아침에 죽었다”
- 최현욱, 키덜트 소품 자랑하다 ‘전라노출’···빛삭했으나 확산
- 수능문제 속 링크 들어가니 “김건희·윤석열 국정농단 규탄” 메시지가?
- 윤 대통령 ‘외교용 골프’ 해명에 김병주 “8월 이후 7번 갔다”···경호처 “언론 보고 알아
- 이준석 “대통령이 특정 시장 공천해달라, 서울 어떤 구청장 경쟁력 없다 말해”
- “집주인인데 문 좀···” 원룸 침입해 성폭행 시도한 20대 구속
- 뉴진스 “민희진 미복귀 시 전속계약 해지”…어도어 “내용증명 수령, 지혜롭게 해결 최선”
- 이재명 “희생제물 된 아내···미안하다, 사랑한다”
- ‘거제 교제폭력 사망’ 가해자 징역 12년…유족 “감옥 갔다 와도 30대, 우리 딸은 세상에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