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사람이 살아남는다고?…난파선 51명 추적해보니 [Books]

김슬기 기자(sblake@mk.co.kr) 2022. 12. 23.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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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도에서 두달간 생존하며
우정 협력 평등주의 사회학습
재난 상황서도 남을 배려해
인류의 진화는 善 향한 궤적
외젠 들라크루아의 작품 ‘돈주앙의 난파선’.
매일 끔찍한 뉴스만 들려온다. 전쟁과 재난, 질병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인간이 낙관론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뭘까. 이 책은 30만 년 전 시작된 인류의 진화는 인간이라는 종을 선한 방향으로 진화시켰다고 주장한다.

니컬러스 A 크리스타키스 예일대 사회과학 및 자연과학 교수는 의사 출신으로 예일대 인간본성연구소 소장과 네트워크과학연구소장을 겸하는,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통섭의 대가’다. 포린폴리시 선정 ‘세계 100대 사상가’로도 뽑혔다. 전작 ‘행복은 전염된다’에서 행복과 불행을 비롯한 감정은 타인에게 전염되며 우정과 환대는 우리를 건강하게, 상실과 이별은 우리를 병들게 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철학, 역사, 인류학, 진화생물학 등을 넘나들며 30년 연구를 집대성한 이 책은 남극기지부터 온라인 게임, 개미와 코끼리 사회까지 들여다보면서 ‘인간 본성의 선한 천사’ 발명에 관해 그럴듯한 가설을 도출해낸다.

지구상의 모든 인간은 인종, 종교, 성별, 이념 등을 이유로 지독하게 반목하지만, 실제로는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훨씬 많다. 이 사실을 저자는 호스피스 병동 의사로 일하며 깨닫게 됐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보편적으로 반응했고, 사람들을 하나로 만들었다. 이 보편적 속성은 진화적 기원이 같다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이 책에 따르면 우리 유전자에는 8가지 청사진(Blue Print)이 돋을새김 돼 있다. 저자가 사회성 모둠(social suite)이라 부르는 특성들은 진화를 이끌면서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삶을 빚어냈다. 개인 정체성을 지니고 알아보는 능력, 짝과 자녀를 향한 사랑, 우정, 사회 연결망, 협력, 자기 집단 선호, 상대적 평등주의, 그리고 사회 학습과 사회 교육이 그것이다. 이 능력으로 지구상에서 오직 인간만이 좋은 사회를 만들어 지구를 지배할 수 있게 됐다. 동시에 이 공통점이야말로 폭력과 증오의 시대가 ‘우정과 환대의 시대’로 나아가는 연결 고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첫 장에서 소개하는 건 난파선 생존자들의 이야기. 인위적 통제가 제거된 인간 본성의 실험이 가능하다. 역사 속에서 숱한 난파선 생존자들은 식인과 살인으로 생존을 도모하기도 했지만 1500년~1900년 19명 이상의 생존자가 2개월 이상 생존한 사고는 겨우 20건에 불과했다. 살인과 식인 등 끔찍한 비극이 일어난 사건도 있었지만, 일부 성공한 조난 사건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훌륭한 리더십, 생존자 간 우정, 협력과 이타주의였다.

1855년 줄리안호는 태평양 실리섬에 난파되어 51명의 생존자가 두 달 동안 버텼다. 구조 당시 선원을 구명줄로 구출하는 과정에서 이등항해사가 돈 가방을 옮기려 하자 선장은 소녀를 데려가라고 지시했을 정도다. 소녀는 구조했지만 돈은 잃었다. 풀무를 만들어 배를 수리했고 배를 몰겠다고 자원한 이들은 목숨을 걸었다. 생존에 실패한 선원들은 개인주의적 태도를 취한 반면, 식량을 공평하게 나누고 협력하고 민주적 투표로 리더를 뽑고 서로를 위해 헌신한 선원들이 생존한 경우가 많았다. 재난 속에서도 우정과 환대의 힘은 빛난 것이다.

또 하나의 진화적 증거는 키스다. 타액과 세균을 교환하는 인간의 행위가 동물들에는 보편적 행동이 아니다. 심지어 남아프리카 총가족을 비롯한 일부 부족은 꺼리는 행위이며 전 세계 168개 문화 중 46%에만 입맞춤이 존재한다는 연구도 있다. 인간이 단순히 번식을 위한 성관계가 아닌 짝을 맺으려는 성향은 입맞춤 같은 행위를 보편화시켰다.

짝결속이라는 인간의 진화 방향은 집단생활이 자리 잡은 뒤 출현했다. 사냥을 위한 근력이 센 남성 대신 협력을 위한 능력을 보유하거나 선물을 주는 남성도 여성에게 선택받게 된 것이다. 여성이 남성과 짝결속을 형성해 집단생활을 하는 종이 되면서 인간은 애착과 사랑의 진화로 나아가는 길에 들어서게 됐다. ‘낭만적 사랑’은 유전자 전달 기계로서의 인간이 성적인 욕망을 넘어 상대와 깊은 감정적 연대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자녀에 대한 사랑 또한 인간의 발명품인 낭만적 사랑의 확대임을 역설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인공지능(AI)과 유전자 편집 기술이 도입되더라도 인간 본성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 예견한다. 저자의 연구소는 AI 로봇과 사람이 함께 조를 짜서 게임을 푸는 과제를 하도록 했다. 실수를 인정하는 로봇이 있을 때 사람들의 상호작용에 변화가 생겼다. 서로 협력을 더 잘하게 된 것이다. 자율주행차가 달리는 도로 위에서도 사람들은 충돌 가능성을 줄이는 방식으로 ‘사회적 진화’를 해나갈 것이라는 증거다. 유전자 편집 도구인 크리스퍼를 통해 인간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미래에 대해서도 저자는 “한편으로는 두려운 생각이 든다”면서도 “여전히 사회성 모둠이 우리 안에 너무나 깊이 뿌리 박혀 있기에 인류의 청사진을 수정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낙관한다. 다양한 연구를 넘나드는 험난한 여정을 거쳐 도달한 책의 맺음말은 그래서 울림을 갖게 된다. “인류 진화의 궤적은 선함을 향해 휘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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