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객열전] '양천구 쿠드롱' 김욱
‘당구의 신’ 쿠드롱마저 꺾다
연말 당구계가 '언더독'의 제대로 된 반란으로 들썩거렸다. '양천구 쿠드롱'이 '진짜 쿠드롱'을 이겨 버린 사건이다. '양천구 쿠드롱'이라는 별명을 가진 김욱(42) 선수가 그 주인공이다. 40대 직장인으로 늦깎이 선수가 된 그는 3부 리그인 '챌린지투어'에 뛰어든 철저한 무명이었다. 올 시즌 PBA 1부 리그 선수를 선발하는 큐스쿨에서 1위를 차지해 꿈에 그리던 1부 리그로 처음 올라왔다. 김욱의 랭킹은 1부 리그 최하위인 128위. 1부 리그에 갓 승격한 꼴찌 선수가 PBA 최다 우승자이자 월드 클래스인 프레드릭 쿠드롱(웰컴저축은행) 선수를 꺾는 기염을 토한 것이다. 그리고 16강까지 거침없이 진격해 연말 PBA의 최대 이변을 일으킨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다.
1부 직행 후 철강대리점 퇴사
10월엔 공인중개사 자격증 합격
불과 7개월 전만 해도 김욱은 3부 리그에서 활동한 그저 그런 선수였다. 말이 선수지 대기업의 철강대리점 영업이 본업이었고 당구는 사실 취미로 즐기는 수준이었다.
그는 2020~2021 시즌 트라이아웃을 통해 3부 리그인 챌린지투어 선수가 됐다. 직장 생활을 병행하면서 당구에 전념하기란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대회에 꾸준히 참가하지 못해 3부 랭킹은 29위에 머물렀는데 32위까지 주어지는 큐스쿨에 턱걸이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큐스쿨 1라운드에서 전체 9위로 2라운드에 진출했는데 거기서 8경기 모두를 승리해 1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래서 올 시즌 PBA 1부 리그에 바로 직행할 수가 있었죠. 지난 5월에 1부 승격이 확정된 후 가족들과 상의 끝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선수 활동에 전념하기로 했는데 그게 지난 6월입니다."
한 달을 끌면서 퇴사를 결정하는 과정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초등학생 1학년과 세 살배기 아이를 둔 가장이 안정된 직장을 나와서 강자들이 즐비한 프로세계에 뛰어드는 일 자체가 너무 불확실한 탓이었다.
"상의하는 동안 머뭇거리던 아내가 조건부로 허락을 했죠. 혹시 모르니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반드시 따야 한다는 조건이었습니다. 마침 저도 부동산 중개업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터라 4개월 동안 열심히 공부한 결과 다행스럽게도 지난 10월 시험에 합격해서 다소 부담을 덜어냈어요."
실제로 그는 내년 초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지인과 함께 사무실을 개업할 계획이다. 40대 가장으로서 자영업을 병행하는 프로당구 선수의 길을 걷기로 한 것이다.
김욱은 당구장을 운영하는 부친의 일을 도와주기 위해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당구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당시만 해도 종업원을 구하기가 여의치 않았다. 당구와 자연스럽게 가까워진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면서 국제식대대를 처음 접했다. 당시 그는 4구 기준 400점 정도의 실력이었다.
"전남 광주에서 첫 직장을 시작했는데 당시 광주에는 제법 유명한 '다모'라는 당구동호회가 활동하고 있었어요. 마침 제가 놀러 간 당구장의 사장님이 '다모' 회원이어서 다모 동호회 고수들과 어울리며 국제식대대의 매력에 빠져들었어요."
취미로 당구를 즐기다가 3부 선수로 등록했지만 사실 본격적인 프로의 길을 가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딱히 스승을 둔 것도 아니어서 항상 실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자각했고 하루 내내 연습에 매진할 환경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기회가 찾아온 겁니다. 큐스쿨에서 8전 전승을 한 날 '그분'이 왔다고 봐요. 스타일 자체가 기세를 많이 타는 편인데 처음부터 잘 풀리다 보니 그날 시합 때는 완전히 날아다녔어요."
쿠드롱 꺾은 순간 심장이 요동
'그리스 천재' 넘고 16강까지
1부 리그에 올라온 김욱은 예선 초반부터 강자들과 만나 연패의 늪에 빠졌다. 올 시즌 1차 투어 128강전에서는 김임권(TS샴푸∙푸라닭), 2차 투어에서는 필리포스 카시도코스타스(하나카드), 3차 투어에서는 강민구(블루원리조트) 선수와 맞붙어 바로 탈락했다.
공인중개사 시험 때문에 4차 투어에 불참한 그는 5차 투어인 '2022 하이원리조트 PBA 챔피언십' 대회에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PBA 최강자인 쿠드롱과 128강전에서 만났다.
"쿠드롱 선수와 대결을 앞두고는 부담감 대신 설렘이 더 컸어요. 살아 있는 레전드 선수와 연습경기도 아닌 공식 대회에서 시합을 치른다는 자체가 영광이었고 꿈만 같았으니까요. 불과 7개월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순간이었죠."
하지만 설렘도 잠시였다. 시합을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는 긴장감이 어깨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위대한 선수 앞에서 부족하지만 가진 실력을 잘 보여야겠다는 생각이 앞섰어요. 평소 제 스타일처럼 치지 않고 힘 조절을 하며 부드럽게 공을 굴리면서 멋지고 우아한 궤적을 구현하는 것에만 신경을 집중한 겁니다. 그러니 공이 맞을 리가 없죠."
1세트는 15:1로 허무하게 내줬다. 머릿속이 하얗게 지워지는 느낌이었다. 김욱은 "질 때는 지더라도 내 당구를 치자"라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자신의 스타일에 집중하자 2세트는 어느새 세트포인트 기회를 맞이했다.
"마지막 1점을 남겨두자 이번 세트를 이길 수 있겠다는 잡생각이 먼저 떠오르는 거예요. 그렇게 멘탈이 흔들리자 결국 역전패로 2세트마저 내준 뒤 다시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설사 2세트를 따온다고 해도 승부차기를 가면 쿠드롱 선수가 초구여서 제가 이길 확률이 없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마음을 비우기 시작했어요."
마음을 완전히 내려놓자 그에게 이미 승부는 관심사가 아니었다. 승패에 구애받지 않고 '나만의 당구'를 구사하자 정말 기적처럼 3, 4세트를 가져왔다. 4세트에서 1점을 남겨 세트포인트가 될 때도 전혀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몰입했다. 마지막 승부치기만 남았지만, 김욱은 평정심을 유지했다.
쿠드롱은 이날 초구 공략에 어려움을 겪어서인지 아니면 초구 배치 난이도가 높아서인지 전략적으로 초구 선공을 양보했다. 김욱의 선공은 공교롭게도 키스가 나면서 성공했다. 하지만 후속타는 불발에 그쳤다. 쿠드롱이 이어받은 배치는 난구였다. 쿠드롱은 고민 끝에 원뱅크로 공략했지만 실패했다. 쿠드롱이라는 거함을 침몰시키는 순간이었다.
"쿠드롱 선수 차례에서 제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기도를 한 게 아니라 쿠드롱 선수의 샷을 도저히 볼 수가 없었어요. 공략에 실패한 쿠드롱이 먼저 다가와 악수를 청하자 저도 모르게 90도로 인사를 했는데 바로 가슴이 쿵쾅거리면서 순간 울컥하더라고요. 함께 경기를 치른 것만 해도 영광인데 승리했다는 사실이 현실로 다가오자 감격스러웠던 것 같아요."
'언더독' 김욱의 돌풍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스의 천재'로 불리는 초대 챔피언 카시도코스타스 선수를 64강전에서 잠재우고 그 기세를 몰아 16강까지 올라갔다.
"16강을 기록한 이후 가족들이 너무 좋아했어요. 아내는 취미로 당구를 즐긴다고 여겼다가 좀 놀란 눈치이고 큰 아이는 그동안 제가 질 때마다 방송을 보고 울었는데 이번에는 신이 났나 봐요. 지인들의 축하 문자도 엄청나게 왔죠."
'우상' 조재호와 결승전 꿈꿔
"아직은 부족한 점 너무 많아"
김욱은 이를 계기로 1부 리그에 계속 잔류하는 것을 우선 목표로 삼았다. 스스로 아직 부족한 선수라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다. 운이 따르면서 16강 성적을 냈지만 아직 배워야 할 부분이 많아 더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가장 보완이 필요한 부분은 기본기라고 생각합니다. 경기에 임하는 투지나 호승심은 좋은 편인데 자세가 아직 불안정한 편이고 난구는 그럭저럭 풀어내지만 포지션을 이어가는 기본 배치 공략이 약점입니다. 기본적인 시스템도 잘 몰라서 보완이 필요하고요. 웬만한 동호인이면 다 아는 '파이브 앤 하프' 시스템을 배우지 않고 지금까지 저만의 기준점으로만 감각적으로 뱅크샷을 시도했어요. 기본기에 대한 심화 과정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김욱은 강동구·황지원 선수의 도움을 지금도 받고 있다. 강동구는 후원사 빌마트를 김욱에게 소개해줬다. '공포의 목장갑'으로 유명한 황지원도 빌마트 소속으로 인연을 맺었다.
"주로 두 분 선배님을 통해 멘탈 관리법, 경기 운영, 경기 피드백 등 많은 조언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의 저를 이끌어주신 멘토라고 할 수 있죠. 최재동 선배님께도 많이 배우는 중입니다."
그의 우상은 조재호(NH농협카드) 선수다. 언젠가 결승전에서 우상과 대결하는 것이 오랜 꿈이기도 하다. 1부 투어에 갓 올라와서 아직은 우상과 공식 경기를 치르지는 못했다.
"김임권과는 오랜 친구인데 어느 날 술자리에서 서로의 꿈을 농담처럼 건넨 적이 있어요. 각자의 우상과 결승전을 해보고 싶다는 거였죠. 김임권은 쿠드롱, 저는 조재호 선수를 꼽았는데 임권이는 실제로 쿠드롱과 결승에서 맞붙어 꿈을 이룬 셈이죠. 저도 그날이 오기를 기대하고 열심히 연습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정완주 기자
스포츠한국 정완주 기자 wjchung12@hankook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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