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이면] 얼굴 그리는 남자
요즘 밤마다 그림을 그린다. 데스크톱 화면에 그리고 싶은 대상을 띄우고 화선지를 대고 윤곽을 베낀다. 도구는 연필을 사용한다. 윤곽을 베낄 때는 얇고 연한 심을 쓴다. 얼굴 전체, 눈, 코, 입, 귀, 목선을 따고 다시 화선지를 책상에 놓고 세부를 묘사해나간다. 눈, 코, 입을 먼저 그린다. 속눈썹부터 눈에 비친 사물 하나까지, 입술의 가느다란 선까지 보이는 그대로 묘사한다. 그러고 나면 대세가 결정된다. 이미 인물이 펄펄 살아 있다. 그다음부터는 쉽다. 리듬을 탔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 지 한 달이 됐다. 처음엔 무심코 시작했다. 넷플릭스에서 영화를 보다가 주인공을 감시하며 음모를 꾸미는 인물의 표정이 너무 섬뜩해 나도 모르게 따라 그려보고 싶었다. 빨간색 플러스펜으로 윤곽을 따고 대충 쓱쓱 그어봤는데 생각보다 괜찮게 나왔다.
그래서 만만한 아내 사진을 띄워놓고 똑같이 해보니 비슷하게 그려지는 게 아닌가. 충격과 흥분이 느껴졌다. 내가 그림을 그리다니! 평생 높은 문턱으로 화가들은 참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내가 그림을 그리다니!
한 달 동안 여러 인물을 그렸다. 아내 2번, 친구 1번, 그다음은 유명한 철학자·문인으로 미셸 푸코, 발터 베냐민, 프란츠 카프카, 롤랑 바르트, 사뮈엘 베케트, 백석, 김수영, 루쉰을 그렸고 대중 아티스트로 이병헌, 탕웨이, 톰 크루즈, 이문세, 이승환을 그렸다. 아내의 영원한 오빠인 이승환을 빼고는 전부 내가 좋아하는 이들이다. 페이스북에 올려서 가장 극찬을 받은 건 김수영과 베냐민이다. 내가 잘 그렸다기보다 인물의 아우라가 잘 드러나는 포즈를 선택해서일 것이다. 아무튼 요즘 바쁘다. 매일매일 그림이다. 며칠 전엔 장모님 사진도 받았다. 잘 그려서 효도해야 할 텐데 손이 떨린다.
고등학교 시절 일화가 있다. 미술 실기시험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교탁에 아그리파 석고상을 턱 올려놓더니 그리라고 하셨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그려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미술책에 실린 아그리파 데생을 보고 그대로 베꼈다. 데생은 이미 인간의 손을 탄 것인지라 베낄 엄두가 났던 것이다. 문제는 그림자가 반대였다. 교탁의 아그리파는 왼쪽에서 들어오는 빛을 받았는데, 내가 베낀 건 오른쪽에서 들어오는 빛을 받았다. 하지만 어쩌랴. 백지 답안지를 내는 것보단 낫지 싶어 그대로 냈는데 너그러운 선생님은 B플러스를 주셨다.
그 이후로 30년이 지나도록 뭔가를 그려본 적이 단연코 한 번도 없다. 직장 동료 집에 놀러갔다가 동네를 스케치한 수채화들을 보고 충동을 느낀 적은 있다. 아, 그리고 싶다. 거의 본능적인 감정이었다. 이런 충동은 생각해보니 일시적인 건 아닌 듯하다. 아주 깊숙한 충동이 숨어 있다가 순간 발현된 것이었다. 나는 늘 내 안에서 물밑 일렁거림을 느끼고 살았다.
그려보니 어렴풋이 알겠다. 뭔가를 재현한다는 것의 즐거움부터 사람의 표정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겉모습이 아니라 속의 근육과 뼈의 움직임을 그려야 눈, 코, 입이 있어야 할 곳에 딱딱 박히는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가까이서 오랫동안 들여다봤기 때문에 완성 단계에서는 반드시 멀리 떨어져서 봐야 한다는 것을. 멀리 떨어져서 보면 애써 표현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던 것이 시작점이 잘못돼서 그랬다는 걸 알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걸 비슷하게 그리는 것은 한 가지 특징을 잘 표현한 것만 못하다는 점이다. 인물이란 반드시 쏠림이 있다. 베냐민의 쏠림은 초점을 잃은 듯한 골똘한 표정과 멍한 눈동자고, 김수영의 쏠림은 전방주시의 직진적 인격이다. 사람과 사람이 사귀는 것도 비슷하다. 어떤 한 부분에 매력을 느끼거나 꽂혀 그것을 중심으로 그 사람의 인격을 수용한다. 한 달 그려보고 무엄한 소리를 하는 듯해 겸연쩍긴 하다.
불필요한 조사나 잘못 사용된 단어와 호응을 바꿔 좋은 글로 다듬어내는 게 내가 하는 편집 교정의 일이다. 윤곽과 면을 다듬어 형태를 찾아가는 작업은 그것과 닮아도 너무 닮았다. 또 하나의 집을 찾은 느낌이다.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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