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지옥’ 논란…예능PD들 “문제적 장면 시청자에게도 폭력”
사연의 소재와 노출 방식에 치중해선 안 돼”
“솔루션 프로그램을 고발 프로그램과 착각해서는 안 된다.”
최근 ‘아동학대’ 방송으로 논란을 일으킨 <오은영 리포트-결혼지옥>(이하 <결혼지옥>) 사태를 두고 한 방송국 예능 프로그램 피디가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한 말이다. 그는 “‘사적인 문제’가 ‘공적인 창구’로 알려질 수밖에 없는 이런 프로그램 성격상 상담자의 고민을 어디까지 보여줄 것인가의 선택은 중요하다”며 “비연예인이 출연하는 상담·솔루션 프로그램은 제작에 더욱 신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결혼지옥> 논란을 계기로 방송국 안팎에서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상담·솔루션 프로그램은 사례를 통해 시청자에게 정보와 교육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 핵심인데, 갈수록 사연의 소재와 노출 방식에 치중해 프로그램이 자극적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것이다.
관찰예능프로그램을 만든 경험이 있는 방송 관계자들은 솔루션 프로그램에서 사례가 제대로 걸러지지 않는 점을 가장 큰 문제로 지적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고딩엄빠>(MBN)다. 범죄로도 볼 수 있는 성인남성과 미성년자 부부 사례를 잇따라 다루면서 자극적인 소재에만 매몰됐다는 비판이 최근 거세게 일었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는 지난 10일 <한겨레>에 쓴 칼럼에서 “성착취의 개념 없이 성인 남성과 미성년 여성의 성을 자연스러운 듯 전시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결혼지옥>에서 논란이 된 장면도 비슷하다. 지난 19일 방송된 ‘고스톱 부부’편에서 아내가 전남편 사이에서 낳은 7살 딸이 “싫다”고 거부 의사를 명확하게 밝히는데도 딸과의 신체접촉을 멈추지 않는 남편의 모습이 여과 없이 방송됐다. 시청자들은 남편의 이런 행동을 두고 “아동 성추행”이라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한 방송사의 예능 피디는 “솔루션 프로그램이라고 해도 방송이기 때문에 범죄로 비칠 수 있는 사례는 소재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촬영을 다 해놓고 적절하지 않아 방송을 못 한 경우는 자주 일어난다고 한다.
관련 내용을 방송을 내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영상에 신중했어야 한다는 게 또 다른 방송사 예능 피디의 주장이다. 그는 “해결책을 제시하고 싶다고 해도 시청자가 문제적 장면을 볼 필요는 없다. 머릿속에 한번 각인되면 잔상이 오래 간다. 문제가 있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은 시청자들한테도 폭력을 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결혼지옥>의 경우도 해당 문제가 아내의 핵심 고민은 아니었기 때문에 부부와 오은영 박사의 대화로 문제를 지적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에서는 제한된 시간이 있는 방송 특성도 이해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 피디는 “방송에서 출연자의 실제 상황이나 겪었던 사연을 짧은 시간 안에 요약해서 보여주게 되는데, 그럴 경우 평소보다 자극적으로 보이기도 한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어떤 것을 편집해 보여주느냐는 전적으로 제작진의 선택”이라며 “프로그램이 출연자를 피해자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결혼지옥> 제작진은 이번 논란에 고개를 숙였다. 이들은 지난 21일 입장문을 내어 “부부의 문제점 분석에만 집중한 나머지, 시청자분들이 우려할 수 있는 장면이 방영되는 것을 세심히 살피지 못했다. 해당 아동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하지 못하고 많은 분께 심려를 끼친 점, 다시 한 번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이어 “앞으로는 실제 녹화 현장에서의 분위기가 온전히 시청자 여러분께 전달될 수 있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겠다”고 덧붙였다.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아동 심리학 전문가 오은영 박사도 23일 입장문을 냈다. 그는 “촬영 시간 동안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아동학대 교육의 연장선으로 ‘아이가 싫어하는 신체접촉을 강압적으로 하지 말라’는 내용을 여러 번 강조하면서 교육적 지적과 설명들을 많이 해 주었다. 이후 실제로 이 출연자 남편이 아이를 대하는 태도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5시간이 넘는 녹화 분량을 80분에 맞춰 편집하는 과정에서 부득이하게 이런 많은 내용이 포함되지 못하여 제가 마치 아동 성추행을 방임하는 사람처럼 비친 것에 대해 대단히 참담한 심정”이라고 밝혔다. 그는 “향후에는 제 의견이 보다 더 정확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더욱더 유념하겠다”고 덧붙였다.
한편, 경찰은 이번 <결혼지옥> ‘고스톱 부부’에서 불거진 아동 성추행 논란 등과 관련해 수사 의뢰를 받고 해당 남성(남편)에 대해 입건 전 조사(내사)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북경찰청 관계자는 “성범죄 피해자의 2차 피해 우려가 있는 만큼 구체적인 사건 내용은 밝히기 어렵다”면서도 “혐의점이 확인되면 관련자들을 불러 경위를 조사하겠다”고 말했다고 <연합뉴스>가 보도했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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