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천년전 별이 멈춰선 마구간 그 자리 14각 별 앞에선 모두가 몸을 낮췄다
지난달 27일(현지시간) 총길이가 500㎞나 되는 분리장벽을 사이에 두고 이스라엘과 마주 보는 팔레스타인 베들레헴의 한 교회(성당) 광장엔 높이 30m짜리 초대형 성탄 트리가 거룩한 분위기 속에 설치되고 있었다. 매년 12월 초 열리는 이곳의 트리 점등식은 영국 BBC, 일본 NHK가 중계할 만큼 '글로벌 빅이벤트'로 꼽힌다. 낯선 땅의 성탄 트리가 유난히 세계인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진짜 이유는, 보는 이를 압도해버리는 거대함이나 수천 알의 전구가 뿜어대는 화려함 때문만은 아니다. 트리 뒤로 보이는 석회암 건물이 아기 예수의 구유가 위치했던 바로 그곳에 들어선 교회여서다. 베들레헴은 예수의 고향으로, 트리 꼭대기의 빛나는 별은 2000년 전 예수 탄생을 알린 최초의 징표를 묵묵히 재현해낸다. 코로나19가 잠잠해진 뒤 첫 번째 성탄절을 앞두고 세계 순례객으로 들썩이는 베들레헴, 나사렛, 갈릴리, 가버나움, 예루살렘 등 예수의 삶을 담아낸 유적지를 걸어봤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검은 사제복의 가톨릭 신부, 정수리에 키파를 착용한 유대교 랍비, 터번을 쓴 무슬림들이 뒤섞여 비록 교리는 상이하지만 결국 '사랑'이라는 동질적 가치로 이어지는 '믿음의 길'을 세인들에게 안내 중이었다.
공포의 총성 너머 '구유의 은별'
이스라엘의 성탄절 성가는 언제나 피비린내 풍기는 공포의 뒤안길에서 울린다. 바티스트프레스 등 현지 외신에 따르면 2022년에만 팔레스타인 150명, 이스라엘 31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공포에 굴하지 않고 베들레헴 거리는 두려움과 분노 대신 3년 만에 물밀듯이 밀려오는 순례단 맞이에 한창이었다. 매점 상인들은 올리브나무를 손으로 깎아 만든 피에타의 먼지를 닦아냈고, 무슬림 밀집지역 건물 외벽에도 예수 탄생을 축하하는 네온사인 별이 밝게 빛났다.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를 해산한 베들레헴은 두 사람의 망명지로 이해된다. 헤롯대왕의 폭압을 피해 선택할 수밖에 없던 여정의 끝에서 동정녀 마리아는 갓난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혔고 목자들은 짐승의 먹이통에 누운 예수를 알현했다(누가복음 2:1~20). 지금 바로 그 자리에 '예수탄생교회'가 세워졌다.
이날 예수탄생교회 지하 1층에 위치한 예수 탄생 지점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몰린 교인 행렬로 인산인해가 펼쳐졌다. 보통 한두 시간의 긴 대기줄을 감안해야 한다. 이들이 인내하는 건 사람의 몸을 입고 온 예수 탄생 지점에 엎드려 인생에서 다시 없을지도 모르는 '단 한 번의 기도'를 올리기 위해서다. 기도처 대리석 바닥엔 금속으로 만든 14각(角) '베들레헴의 별'이 박혀 있다. 오랜 세월 어찌나 많은 순례객이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별을 만졌는지 조각에 양각된 라틴어 글자('여기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셨다')가 닳고 닳아 판독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예수탄생교회에 서면 '베들레헴의 별'에 권위를 부여하는 장식의 화려함 사이로 신의 아들이자 삼위일체를 이루는 예수가 그날 왜 비천한 소읍인 베들레헴, 하필 그중에서도 마구간, 게다가 짐승의 낡은 구유에 누워 삶을 시작했는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도시명 베들레헴의 어원은 '떡집' 혹은 '빵집'이다. 구유 위의 아기 예수는 훗날 자라나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일갈했고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라"(요한복음 6:51~54)라고 재차 강조했다. 그러므로 '베들레헴, 마구간, 구유'는 단지 우연한 요소들의 조합만은 아닌 셈이다.
순례에 동행한 소강석 새에덴교회 목사는 장소와 사물에 깃든 섭리를 간파해낸다. 소 목사는 "예수님은 세상의 먹이가 되고자 '맨살의 아기'로 오셨다. 짐승보다 타락한 인류를 위해 생명의 양식으로 세상에 임하신 것"이라며 "예수탄생교회로 들어서는 입구의 높이는 수백 년간 2차례 낮아져 현재 1.2m 남짓인데 이는 예수를 만나는 인류 모두가 허리 숙여 겸손해져야 함을 뜻한다. 한국 교회도 더 낮은 자세로 다가가야 함을 절절히 느낀다"고 강조했다.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탄생 이후 예수의 행적은 ①세례와 시험 ②기적과 고난 ③사망과 부활이라는 공생애로 이어진다. 한 인간의 삶과 죽음, 그가 내뱉은 무수한 비유와 이를 둘러싼 해석은 서구 기독교와 한국 기독교를 지탱하는 서사적 기둥이었다. 바로 그곳 이스라엘은 지난 2년간 코로나19로 순례객의 방문이 끊겨 "전염병이 정치적 긴장보다 더 파괴적이었다"는 말이 돌 정도로 썰렁했다. 이제 그곳엔 다국적 순례객이 예수를 추존하며 찾아와 자신만의 영적인 길을 발견하기 시작했고 도시는 다시 활기를 되찾는 중이다.
요단강 세례터도 순례에 동참한 무리가 모여드는 성소다. 이스라엘과 시리아 국경 앞 비무장지대에 위치해 있어 방문이 쉽지 않지만 얕은 언덕 아래 강을 내려다보면 처음 보는 광경이 펼쳐진다. 예수를 따라 침례(浸禮) 의식을 갖는 교인들이 문전성시를 이룬다.
요단강은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강이다. 갈릴리를 떠나 요단강을 찾은 예수는 세례자 요한에게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義)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태복음 3:13~17)라고 말하며 세례에 임했고, 세례를 마칠 즈음 하늘에서 '하나님의 영(靈)'과 같은 비둘기가 내려왔다고 성경은 전한다. 당시 비둘기는 유대 왕의 문장(紋章)이어서 예수의 세례식은 성서적 대관식으로 해석된다.
이날 방문한 요단강 세례터는 너비 10m도 되지 않는 좁은 강이었다. 물색이 짙어 안이 보이지 않는 흙탕물인데도 순례객들은 미리 준비한 하얀 원피스 차림의 세례의복으로 환복한 뒤 본격적인 겨울을 앞두고 차가워진 강물에 망설임 없이 몸을 정수리까지 담갔다. 30여 명의 교인을 이끌고 요단강 세례터를 찾은 정교회 소속 이반 시치칼레 신부는 "이곳 요단강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은 성스러운 장소로, 비록 차갑지만 물속까지 잠기는 의식을 통해 우리의 원죄를 씻고자 한다"고 말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은 예수는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한 뒤 세 번째 시험에 든다. '시험산'이라고도 불리는 '유혹의 산'은 그 유명한 여리고성 유적지 인근에 위치한 해발 258m 쿠룬툴산으로 지금까지도 여전히 나무 한 그루 없을 만큼 황량하다. 광야에서 첫 번째 시험을, 예루살렘 성에서 두 번째 시험을 당한 예수는 '지극히 높은 산'(마태복음 4:8~11)에서 마지막 시험을 당하지만("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인간적 욕망을 거부한다. 쿠룬툴산 중턱에서는 그리스 정교회 수도원이 위태로운 비탈에 세워져 수백 년 세월을 일러준다. 지상과 산중을 잇는 케이블카가 그 사이로 천천히 오가며 순례객을 맞는다.
기적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예수는 신의 권능을 몸에 입은 사람의 아들이었지만 그의 정체성은 세상의 구원자였다고 신약성경은 일관되게 증언한다. 이로써 후대는 예수를 기적을 행하는 초월적 존재로 바라본다. 반면 예수의 배척자들은 그의 성령적 권위를 불허한다. 벳새다 언덕은 예수를 바라보는 그런 두 시선을 함께 사유하기에 좋은 땅이다.
갈릴리 호수에서 멀지 않은 벳새다 언덕은 해발 1000m 위 골란고원에 자리 잡은 초원이다. 저 멀리 시리아 초원이 한눈에 보이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한 까닭에 21세기 현대사에서도 가장 논란이 짙은 땅으로 언급된다. 현재 이스라엘이 실효지배 중인 골란고원 내 벳새다 언덕은 예수 생전에 어촌마을이었는데 오래전에도 군사적 요충지였던 만큼 당시에도 거대한 성이 세워졌다. 기원후 8세기 벳새다 성은 아시리아군 진격으로 파괴됐다. 당시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성벽은 지금도 곳곳에 흔적이 여전했다.
골란고원의 벳새다 언덕은 예수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였다는 '오병이어 기적'을 행한 바로 그 지점이다. 성경에 따르면 어른 남성만 5000명이었니(누가복음 9:14) 여성과 아이까지 포함하면 족히 2만명이 예수의 발걸음을 따랐다고 성직자들은 추정한다. 4대 복음서가 공통적으로 오병이어 기적을 기록했을 만큼 인간의 셈법으로 불가해한 이 초자연적인 사건은 당시에도 큰 사건이었다고 전해진다. 기적을 눈으로 본 수만 명의 추종자와 달리 벳새다 주민은 예수의 기적을 믿지도 따르지도 않았다. 소강석 목사는 "벳새다는 당시 규모가 큰 도시로, 똑똑하고 부유한 사람들은 숱한 기적에도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지 않았다"며 "기적이 없어도 되는 사람, 기적을 필요로 하는 제자 가운데 어떤 길을 따를 것인지 우리는 자문하게 된다"고 말했다.
'비아 돌로로사'와 '멘사 크리스티'
종려나무 잎을 흔드는 행렬 사이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의 고난은 어느덧 비(非)신자에게도 익히 알려진 바와 같다.
예수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체포되어 고난을 받았고, 사형을 부르짖는 유대인들의 뜻에 따라 십자가에 매달려 절명한 뒤 3일 만에 부활해 예루살렘 성도 500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승천했다고 성서는 기록한다. 그래서인지 순례의 백미는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오른 예루살렘 올드시티(구시가지)에 위치한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슬픔의 길)'가 아닐 수 없다.
비아 돌로로사의 종착지는 예루살렘 구시가지 북서쪽 골고다 언덕에 위치한 '예수성묘교회'다. 예수를 눕힌 동굴 무덤을 덮어 만들어졌다. 나이도 피부색도 모두 다른 이들이 이곳에선 오로지 같은 것을 보고야 만다. 성묘교회 2층 십자가 앞 벤치에서 만난 인도 벵갈루루 출신의 대학생 눔 내시 씨는 "선교사직을 염두에 두고 오스트리아에서 의학을 전공 중"이라면서 "인도에도 가톨릭 인구가 점차 많아지고 있으며 예루살렘 성지순례도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죄악에 물든 현대인이 들러야 하는 순례처는 베드로의 이름이 성지의 이름으로 남은 두 개의 장소일 수도 있다. 베드로는 예수의 예언대로 새벽닭이 울기 전에 예수를 세 번 부인했다(마태복음 26:69~75).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뜰 아래 지하감옥에 갇힌 예수를 "모른다" 맹세한 베드로는 건물 밖으로 나가 통곡한다. '베드로통곡교회'는 그 자리에 세워졌다. 현재 이 교회 지하감옥에는 예수의 두 손을 묶은 천장에 두 개의 구멍이 여전히 뚫린 채 남아 있다. 훗날 무덤에서 부활한 예수는 갈릴리 호수로 낙향해 그들이 처음 만났던 날처럼 고기잡이를 하던 베드로 앞에 다시 나타났다(요한복음 21:4~13). 갈릴리 인근 바위에 선 예수는 베드로 일행에게 숯불을 구워 떡과 생선을 직접 먹였는데 그들 무리 중에 예수에게 감히 "당신은 누구요"라고 묻는 이가 없었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바위 위에 '베드로가 제자 중 제1의 권위를 회복했다'는 뜻을 가진 '베드로수위권(首位權)교회'가 고요한 호수 옆에서 순례객을 맞는다.
먼 길을 안내한 이스라엘 권위자 이강근 유대학연구소장은 "'멘사 크리스티(mensa christi·그리스도의 식탁)'라 이름 붙여진 이 교회의 바위에 들르면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이 예정된 탄성처럼 나오고야 만다"고 힘주어 말했다.
[베들레헴·예루살렘/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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