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주하는 슈퍼카 뒤편엔 에어컨도 없는 ‘종이 버스’ 그 안엔 ‘중동 드림’ 품은 외국인 노동자의 땀과 눈물[다른 삶]

기자 2022. 12. 23. 16:06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아라비안 라이프
아부다비 도로 위 이색 풍경

35만원짜리 교통 범칙금 고지서 한 장이 날아왔다. 스쿨버스 정차 시 정지신호 위반이란다. 아부다비 경찰서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이 어마어마한 범칙금이 통보된 날, 나는 뒤늦은 후회를 하느라 밤을 꼬박 새웠다. 당시 상황을 기억해내려고 이불 속에서 머리를 쥐어뜯다가 교통경찰국을 찾아가 보았다. 죄(?)를 지어놓고 경찰서를, 그것도 남의 나라 경찰서를 찾아가는 데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이슬람 왕권 국가들은 지도자의 강력한 통치가 국가 운영의 모토이기에 길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아부다비 경찰관의 모습은 어딘가 무섭고 엄격한 이미지였다. 그러나 이런 나의 우려가 무색하게도 아부다비의 경찰관들은 친절하고 서비스 정신이 투철했다.

모터스포츠에 대한 인기가 높아 세계적인 자동차 브랜드의 각축전이 벌어지는 ‘F1 그랑프리 아부다비’에 전시된 홍보용 차량.
아부다비 시내에서는 일명 ‘종이 버스’라 불리는 차량도 쉽게 만날 수 있다. 더운 여름날에도 창문을 열고 달리는 이유는 차량 내부에 에어컨 대신 선풍기가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그만 구식 선풍기조차 없는 경우도 있다.

경찰서 안은 여러 가지 교통 민원을 들고 찾아온 외국인들로 북적거렸다. 국적은 각양각색이지만 모두 어깨와 무릎이 노출되지 않은 옷을 입었다. 아부다비의 공공기관을 출입할 때의 규칙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점은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각종 민원을 들고 읍소(?)하는 와중에도 싫은 내색 하나 없이 세심하게 응대하던 경찰관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적나라하게 찍힌 나의 위반 영상을 보여주며 “벌점이 높으니 앞으로는 더 조심해서 운전하라”라는 친절한 안내까지 덧붙였다. 아부다비의 스쿨버스 정지 신호판 안쪽에는 카메라가 숨겨져 있어 정차 시 스쿨버스를 지나치는 양방향의 차량을 전부 녹화해서 교통경찰국으로 전송한다. 당신이 법규를 잘 몰랐던 외국인이라도 선처는 없다.

스쿨버스 정지신호 위반 범칙금은 사실 UAE의 교통 위반 사항 중 처벌 강도가 약한 쪽에 속한다. 운전자들을 떨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위반사항은 신호위반이다. 빨간색 정지신호를 무시하고 지나쳐갔다가는 차량을 한 달간 압류당하는 처벌이 내려지기 때문이다. 이곳의 신호등은 초록 불이 꺼지기 전에 깜빡깜빡하다가 노란색으로 바뀌고 그 뒤 빨강으로 변한다. 초록 등이 깜빡일 때부터 멈출 준비를 하라는 신호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를 위반해서 압류당한 차량은 사막의 허허벌판 공터에 보관되었다. 한 달을 내리 뜨거운 햇빛과 모래바람을 맞으며 서 있던 차량을 인수하러 가면 그 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다행히 최근에는 너그럽게도 차주의 주차장에 세울 수 있게 해주는 대신 움직임을 추적하기 위해 GPS를 부착하는 형태로 변경되었다. 만약 차를 한 달간 압류당하기 싫다면, 깔끔하게 추가 범칙금을 내면 된다. 단돈 1750만원이다.

강력한 교통 법규가 때론 야속할 때도 있지만 이곳의 사나운 운전 인심을 매일같이 경험해보면 그 존재 이유가 절로 이해가 된다. 아부다비와 두바이가 연결된 고속도로는 시속 140㎞까지 질주가 가능하지만 나 같은 초보가 생각 없이 1차선으로 달리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 조금이라도 속도를 늦추면 뒤에서 따라오는 차량이 안전거리를 무시하고 하이빔을 쏘아대며 속도를 더 내라고 채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험천만한 운전 행태들 때문에 UAE의 사망원인 중 무려 3위가 교통사고다 .

하지만 남편에게 운전대를 건네준 날이면 여유롭게 조수석에 앉아 도로 위의 다양한 차들을 구경하는 것은 이곳에서 느낄 수 있는 쏠쏠한 재미 중 하나다. 그간 바퀴 달린 것은 버스, 트럭, 자가용, 오토바이 정도로만 구분했던 내가 이곳에서 살게 된 이후로 자동차 브랜드와 모델을 줄줄 외우게 되었으니 말이다.

도로에서 만나는 차들의 번호판 자릿수도 제각각이다. 이 번호판에는 재미있는 비밀이 숨겨져 있는데, 차량 번호를 보면 차주의 권력과 재력을 알 수 있다. 한 자릿수는 왕족이거나 슈퍼리치들이 경매를 통해 어마어마한 돈을 주고 사는 번호판이다. 그해 가장 비싸게 팔린 번호판은 사람들 사이에서 크게 회자되기도 한다. 2022년 공개 경매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 번호판은 ‘AA8’로 약 124억원에 낙찰되었다. UAE 사람들은 7개의 토후국을 의미하는 숫자 ‘7’을 좋아하여 인기가 많고, 힌두교를 믿는 인도 사람들은 숫자 8이나 9를 좋아해서 해당 번호판이 인기가 높다고 한다. 차량 모델번호와 번호판을 일치시키는 것을 좋아하는 마니아들도 있다. 예를 들어 ‘페라리 789’를 소유했다면 ‘789’ 번호를 갖기 위해 끊임없는 입찰을 시도한다고. 하지만 역시 가장 비싼 번호판은 숫자 ‘1’이다. 해당 번호는 아부다비에서 무려 184억원에 판매되었던 이력이 있다. 번호판 하나에 그렇게 큰돈을 쓰는 게 이해가 안 되기도 하였지만, 이곳에서는 자신의 부와 권력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며 경매 수익금은 좋은 일에 기부된다고 하니 ‘아이고 부럽다’는 마음의 소리가 한편에서 새어 나온다. 참고로 나는 외국인에게 발급해주는 5자리 번호판을 달고 다닌다 .

가끔 “거기는 정말 경찰차도 슈퍼카야?”라는 질문을 받는다. 도로를 질주하는 슈퍼카들의 과속 단속용으로 마련된 두바이 슈퍼카 경찰차가 도시의 이미지를 고급스럽게 만드는 데 한몫 톡톡히 한 모양이다. 우리의 상상 속 ‘두바이’에는 시내를 가득 메운 슈퍼카 행렬이나 금칠 두른 희귀한 자동차가 어디에든 주차되어있는 모습이지만 막상 그런 슈퍼카를 만날 기회가 그리 흔치 않아 아쉬울 때도 있다. 사실 이곳에서 매일같이 마주치는 차들은 따로 있다.

UAE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차는 일본산 대형 SUV이다. 오프로드에 특화된 해당 차종은 사막 지형에서도 운행이 가능할 정도로 힘이 좋기에 인기가 많다. 후미에는 토끼 꼬리같이 생긴 견인 장치를 달고 다니는데 트레일러나 요트 등을 운반하는 데도 사용할 수 있으니 그들의 고급스러운 취미생활을 보조해주는 용도로도 안성맞춤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차량은 연비가 좋지 않은 편이지만 산유국 국민은 연비에 대한 걱정은 크게 하지 않는 듯하다. 지금 같은 고유가 시기에도 국가에서 인플레이션 수당을 받기 때문이다. 자국민이라면 전기세나 수도세도 할인되고 그 비싼 병원비마저도 전액 무료라고 하니 자국민 친구들의 여유로운 씀씀이와 온화한 미소가 절로 이해가 된다. 7인승 차량이 인기가 좋은 이유는 한 가지가 더 있다. 그들의 가족 구성원이 우리네보다 많기 때문이다. 그 가족 구성원에는 자녀뿐 아니라 아이들을 돌봐주는 보모나 메이드의 숫자도 포함된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지만 아부다비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신기한 차량이 하나 있다. 일명 ‘종이 버스’라고 불리는 대형 버스다. 실제로 종이로 만들었을 리 없지만 가까이서 보면 누가 지었는지 이름 하나는 참 찰떡같이 붙였다는 생각이 든다. 이들 버스는 하얀 칠이 벗겨지고 이곳저곳이 종이처럼 우그러져 있지만 수리를 하지 않은 채 달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배기통으로는 회색빛 연기가 풀풀 나와서 뒤에서 보고 있으면 자동차 점검을 한 번이라도 받았을까 싶은 의심이 절로 든다. 이들은 여름에도 항상 창문을 열고 달리는데 그 이유는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면 내부에 1980년대에 쓰던 구식 미니 선풍기가 쪼르르 달려있기는 하다(없는 경우도 있다). 그 종이 버스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은 개발도상국에서 몰려온 외국인 건설 노동자이다. 아부다비에서 인력 소개 일을 하고 있는 인도 친구의 말을 빌리면, 학력이나 경력이 없는 일반 목수들의 인건비는 한 달에 50만원 정도라고 한다. 최저시급에도 미치지 못하는 임금이지만 그들은 이 급여로 자국에 있는 가족뿐 아니라 일가친척까지 부양하는 경우도 많다 .

밖에서는 숨쉬기조차 버겁게 느껴지는 여름날, 나는 에어컨이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실내에 앉아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튀르키예에서 온 친구와 수다 삼매경에 빠져있다가 우연히 새로 짓고 있는 옆 건물 공사장에 시선이 다다랐다. 그곳에는 수많은 인부가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친구는 잠시 슬픈 표정을 짓더니 입을 뗐다.

“나는 이렇게 더운 여름에 일하는 인부들을 보면 마음이 아파. 어릴 때 우리 아빠가 중동에서 저런 일을 하셨거든. 아빠 말로는 숙소에서 10명 이상이 함께 생활했고 50도에 가까운 날씨에도 일을 해야 했대. 사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크게 감흥이 없었어. 그런데 여기 와서 나도 아이 엄마가 되고 우리 아빠가 했던 일을 눈앞에서 맞닥뜨리면…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와. 우리 아빠, 참 고생 많이 하셨겠다는 생각이 들어.”

숙연한 마음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중동드림을 품고 이곳에 온 사람들은 고향에 돌아가면 내 집을 갖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온몸이 타는 듯한 더위를 이겨내며 지금도 사막 나라의 랜드마크 건물을 지어 올리고 있다.

▶조혜임

국내외 기업에서 커뮤니케이터로 일했다. 현재는 남편, 쌍둥이 딸과 아랍에미리트연합에 거주하며 현지의 일상을 글과 그림에 담아 소셜 플랫폼에 연재하고 있다.

조혜임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