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사, 낙동강 방어선 지켜낸 워커 장군 72주기 추모

김태훈 2022. 12. 23.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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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고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다. (전선을) 지키지 못하면 죽음뿐이다(Stand or die)."

6·25전쟁 초반 한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 안에 갇혀 있을 때 미8군 사령관이던 월턴 워커(1889∼1950) 장군이 장병들을 독려하며 한 말이다.

워커 장군은 직접 최전선을 시찰하며 한국군, 그리고 미군이 주축이 된 유엔군을 다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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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들에 "전선 못 지키면 죽음뿐" 다그쳐
1950년 12월 23일 전방 시찰 도중 사고死

“우리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고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다. (전선을) 지키지 못하면 죽음뿐이다(Stand or die).”

6·25전쟁 초반 한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 안에 갇혀 있을 때 미8군 사령관이던 월턴 워커(1889∼1950) 장군이 장병들을 독려하며 한 말이다. 23일 한·미동맹의 상징과도 같은 워커 장군의 72주기 기일을 맞아 유엔군사령부가 장군의 공적을 기렸다.
6·25전쟁 도중인 1950년 12월 23일 한국에서 미8군 사령관으로 복무하다가 숨진 월턴 워커 장군. 사후 중장에서 대장으로 1계급 진급이 추서됐다. 유엔사 SNS 캡처
유엔사는 이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게시한 글과 사진을 통해 고인을 추모했다. 유엔사에 따르면 고인은 미국 텍사스주(州)에서 태어나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가 되어 군인의 길을 걸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 모두 참전해 유럽 전선에서 독일군과 싸웠다. 1950년 6월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한 뒤 미8군 사령관으로서 한국을 지켜내야 하는 중대한 임무가 그의 어깨에 지워졌다.

전쟁 초반 서울을 북한에 빼앗기고 후퇴를 거듭한 한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전선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았다. 이 방어선마저 뚫리고 북한군이 남하하면 부산을 임시 수도로 삼고 있던 대한민국 정부는 바다 건너 제주도, 또는 태평양의 어느 낯선 섬으로 옮겨야 할 처지였다. 워커 장군은 직접 최전선을 시찰하며 한국군, 그리고 미군이 주축이 된 유엔군을 다그쳤다.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지 못하면 죽음뿐’이란 장군의 불호령에 장병들은 그야말로 사력을 다해 싸웠다. 북한군은 끈질기게 방어선 돌파를 시도했으나 죽음을 각오한 한국군과 유엔군의 저항에 번번이 가로막혔다. 2020년 100세를 일기로 타계한 백선엽 장군이 승리로 이끈 경북 칠곡 다부동 전투(1950년 8월 3∼29일)가 대표적이다.

그 뒤 1950년 9월15일 맥아더 원수가 이끄는 유엔군이 인천에서 대규모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한국군도 드디어 낙동강 방어선을 넘어 꼬리를 내리고 도망치는 북한군을 추격하면서 북진했다. 서울을 탈환하고 난 뒤인 1950년 12월23일 워커 장군은 전방 부대 시찰을 위해 차량을 타고 이동하던 중 경기 의정부 부근에서 교통사고로 숨졌다. 당시 나이 61세, 계급은 중장이었다. 고인은 미국으로 운구돼 이듬해인 1951년 1월2일 수도 워싱턴 인근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미 행정부는 고인의 공적을 기리고자 대장으로의 1계급 진급을 추서했다. 오늘날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서울 광진구의 전망 좋은 언덕 위 워커힐(Walker Hill) 호텔은 그의 이름을 따 지었다.
6·25전쟁 당시 맥아더 원수(오른쪽)가 월턴 워커 미8군 사령관을 격려하는 모습. 맥아더는 전쟁 발발 직후 창설된 유엔군사령부의 초대 사령관을 지냈다. 유엔사 SNS 캡처
평택 미군기지 캠프 험프리스 안에는 고인의 동상이 세워져 굳건한 한·미동맹을 상징하고 있다. 6·25전쟁 당시 고인과 함께 싸운 백선엽 장군은 타계 직전 “평택의 미군 부대를 찾아 부대 내 워커 장군 동상 앞에서 한·미동맹 강화를 위한 메시지를 남겨달라”는 유언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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