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국회 막자고 했지만…선진화법 사망 선고[홍영식의 정치판]

2022. 12. 23.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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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 국회’ ‘꼼수 국회’ 등장, 예산안 법정 기한 어기기 예삿일 되면서 10년 만에 무력화

홍영식의 정치판

민주당과 민노당 의원들이 2008년 12월 18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 상정을 막기 위해 해머로 국회 외교통상통일 위원회 회의실 문을 부수고 있는 장면. 국회선진화법 제정의 한 원인을 제공했다. 한경 자료사진



2008년 12월 18일 전쟁터를 방불케 한 국회 외교통일통상위원회 회의장은 우리 정치사에서 치욕의 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당시 여당이던 한나라당은 문을 걸어 잠그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을 상정하려고 했다. 야당인 통합민주당이 한·미 FTA 비준안을 강력 반대하는 바람에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전기톱과 해머, 소화기로 회의장 출입문을 부쉈다. 이 장면은 외신을 통해 전 세계에 보도되면서 한국 국회는 국제적으로 망신을 샀다. 우리 국회에 ‘동물 국회’라는 오명을 안겨준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2011년 11월 22일엔 국회 본회의장에서 최루탄이 터졌다. 한·미 FTA 비준안 처리에 반대하던 당시 김선동 민주노동당 의원이 터뜨렸다. 이 역시 주요 외신들의 속보를 통해 전 세계에 생생하게 전달됐다. 한국의 비상식적이고 특이한 사건으로 취급되면서 국격에 먹칠을 당했다. 강기갑 민주노동당 의원이 2009년 1월 책상에 올라가 발을 구른 이른바 ‘공중부양’은 국회 폭력의 대명사로 남아 있다. 집단 난투극까지 벌어졌다. 한국 국회가 툭하면 몸싸움과 욕설이 난무하지만 이렇게 18대 국회(2008년 6월~2012년 5월)가 유독 심했다.

 

 19대 총선 과반 의석 자신 없던 새누리당이 앞장

19대 국회 말 이런 ‘동물 국회’를 막고 정치를 개혁하자는 취지로 국회선진화법안(정식 명칭은 국회법개정안) 제정 주장이 나온 배경이다. 이 이슈를 누가 먼저 선점하느냐가 국민에겐 ‘개혁 정당’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었다. 이런 이유와 함께 선진화법을 추진하게 된 또 다른 배경도 있었다. 여당이던 새누리당은 2012년 4월 19대 총선을 앞두고 과반 의석에 자신이 없었다. 새누리당은 4년 전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치러진 18대 총선에선 과반인 152석을 얻었다. 하지만 19대 총선은 임기 말로 접어든 이명박 정부의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어 상황이 달랐다. 

과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하고 연말 대선까지 패배한다면 비빌 언덕이 없어져 정국의 주도권을 완전히 잃을 수 있다는 게 새누리당의 우려였다. 새누리당이 선진화법 제정에 적극 나선 이유다. 당시 야당이던 민주통합당도 폭력 국회를 막겠다는 취지의 법안에 반대할 이유와 명분이 없었다. 황우여 새누리당 원내대표와 김진표 민주통합당 원내대표가 주도해 선진화법의 틀이 완성됐다. 새누리당에선 남경필·황영철·김세연 의원 등이 속한 ‘국회 바로세우기 모임’이, 야당에선 김성곤·원혜영·김춘진 의원 등이 활동하던 ‘민주적 국회운영을 위한 모임’이 뒤에서 적극 받쳐 줬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회의장의 법안 본회의 직권 상정 요건을 천재지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 등으로 제한했다. 국회의장이 소수당의 의견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법안을 직권 상정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취지다.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통과가 안 된 쟁점 법안은 ‘신속처리제도’를 통해 본회의에 올릴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이 제도를 이용하려면 해당 상임위원 5분의 3 이상 또는 전체 국회의원 5분의 3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 이 역시 다수당의 전횡을 막자는 취지에서 법안 처리 요건을 과반에서 문턱을 대폭 높인 것이다.

그런데 여야가 이런 내용의 법안을 만들기로 합의한 뒤 변수가 발생했다. 2012년 4월 19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예상과 달리 과반 의석(152석)을 확보해 버린 것이다. 이재오 의원 등 비주류들이 강하게 반대했다. 법안 통과 요건은 과반 찬성이다. 과반 의석을 확보한 마당에 이 법안이 국회를 통과한다면 새누리당은 집권 여당으로서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컸다. 선진화법대로라면 야당이 반대하는 쟁점 법안 통과 요건인 5분의 3은 국회의원 300명 중 180명이다. 새누리당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과반 다수결 의결이라는 의회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을 무너뜨릴 뿐만 아니라 새누리당은 집권 여당으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당내 반발이 거셌다. 

그러나 당시 ‘약속을 지키는 정치인’임을 강조해 온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의 의지가 강했다. 선거 전 약속해 놓고 선거에 이겼다고 약속을 파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격론 끝에 새누리당이 찬성하면서 국회선진화법안은 2012년 5월 2일 국회를 통과했다. 물론 새누리당 내에서 상당수 반대표도 나왔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동물 국회’ 오명을 벗자고 만든 선진화법이 과연 우리 정치 문화를 업그레이드하는 데 도움이 됐을까. 불행하게도 그렇지 않았다. 당초의 우려대로 여러 폐단을 낳았다. 소수당이 반대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면서 ‘식물 국회’라는 조롱을 받았다. 법안 처리율이 선진화법 이전인 18대 국회 26.9%에서 19대 국회 15.0%로 뚝 떨어진 것을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타협과 협치는 잘 이뤄지지 않았고 갈등과 힘 겨루기라는 기존의 폐단들이 온존했다. 새누리당은 소수 야당의 태클에 제대로 대응을 못했다. 물리적 폭력은 줄어든 대신 언어 폭력이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후진적 정치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법안 하나 처리하는 게 힘들어지자 여야가 서로가 중점적으로 추진하는 법안을 하나씩 주고받는 흥정도 횡행했다. 이런 폐단들로 인해 논란이 일자 새누리당은 2016년 법 개정을 총선 공약으로 내놓았다. 소수 야당에서조차 “차라리 동물 국회가 낫다”는 말까지 나왔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아무도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지는 못했다.

 

 탈당시켜 무소속 만든 뒤 법안 처리 ‘꼼수’ 횡행



21대 국회 들어선 꼼수들이 등장했다. 선진화법상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여야 이견이 큰 법안의 경우 여야 조정위원을 3명씩 동수로 하는 안건조정위를 구성한 뒤 최장 90일간 숙의하도록 하되 3분의 2(4명) 이상 찬성하면 곧바로 안건을 처리할 수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위장 탈당하거나 이미 탈당한 의원을 관련 상임위 안건조정위에 ‘무늬만 무소속’인 야당 몫으로 집어넣어 실질적으로는 여야 2 대 4 구도로 만든 뒤 법안을 처리하는 꼼수를 부렸다. 법제사법위원회에서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안을 안건조정위원회에서 처리할 때 민주당을 ‘위장 탈당’한 민형배 무소속 의원이 야당 몫 위원으로 참여해 친정 편을 들면서 선진화법은 단 8분 만에 무력화됐다.

민주당은 자기 당 출신 박완주 무소속 의원을 야당 몫의 안건조정위원으로 지명해 공영 방송 지배 구조를 바꾸는 내용의 방송법 개정안을 강행 처리했다. 역시 민주당 출신의 무소속 윤미향 의원을 동원해 쌀 초과 생산분을 정부가 강제 매입하도록 하는 내용의 양곡관리법 개정안과 탄소중립법을 밀어붙였다. 지난해 언론중재법 처리 때는 당시 범여당인 열린민주당 소속(현재 민주당) 김의겸 의원을 활용했다. 

선진화법엔 여야가 다음 연도 예산안을 11월 30일까지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합의하지 못하면 자동으로 본회의에 부의(附議)해 12월 2일까지 처리하도록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두 번만 지켜졌다. 2022년에는 예산안이 선진화법 제정 이후 처음으로 정기국회 회기(12월 9일까지)를 넘겼다. 법 어기기가 예삿일이 된 것이다. 이 정도면 선진화법은 우리 정치를 선진화시키기는커녕 더 후진시켰다고 해도 무방할 지경이다. 선진화법은 사망 선고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홍영식 한경비즈니스 대기자 및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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