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수기당', '강성팬덤당'…공천을 향한 전력질주
[최창렬 용인대 특임교수(ccr21@hanmail.net)]
정당은 공적기구는 아니지만 정치권력을 창출하고, 사회의 이해관계 충돌을 제도권 내로 수렴하여 사회갈등을 조정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등 정치사회가 작동케 하는 주요 행위인자이다, 또한 정당체제에 안정성을 부여하고 이익을 표출·집약함으로써 정책 수립에 기여하며 이러한 기능을 통하여 정치의 실질적 동력을 제공한다.
이렇듯 정당에 주어진 다양한 기능을 고려할 때 정당정치 없는 현대정치는 상상할 수 없다. 물론 내각제와 대통령제 권력구조는 정당의 작동 방식이 다르고 같은 권력구조라 하더라도 각국의 정치문화나 정당 생성의 역사적 배경 등에 따라서도 정당의 운용방식이 같을 수는 없다.
이러한 차이를 인정하더라도 현대정당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능은 문지기(gatekeeper) 역할이다. 일반적으로 문지기 역할은 외부로부터 수혈된 인사가 국민을 상대로 선동을 일삼고 팬덤 지지층을 형성함으로써 독재와 권위주의적 행태를 보일 때 정당이 이를 제어하는 기능을 의미한다.
이러한 원론적 의미 이외에 정당의 문지기 역할은 소수의 정당 지도부가 정당 전체를 장악하여 당론을 명분으로 정당 본래의 기능을 왜곡할 때 이를 막는 것도 포함된다. 정당이 이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 정당구성원들은 거수기로 전락하고 정당의 본래 기능이 형해화된다. 이 말은 한국의 거대정당에게 정확히 적용되는 말이다.
헌법과 법률에 명기된 예산안 법정시한을 어기는 것을 당연한 관행으로 아는 의원들, 당 대표의 사법 혐의 가능성에 대해 함구하고, 비호로 일관하는 제1야당의 강경파 의원들은 정당의 문지기 역할을 명시적으로 포기한, 공천에 함몰된 정치기능인의 전형들이다.
집권당에게 박제된 문화는 또 다른 정치기능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대통령의 의중을 살피는데 최적화된 여당의 정치문화는 또 다른 공천 대기자들의 모습들이다. 대통령을 둘러싸고 있는 소수의 그룹이 정당전체를 지배하며 강성 보수만을 보고 편향(bias)에 편승하는 정치 행태는 여당이 대통령실의 종속변수로 전락하는 정치 퇴행의 원인이 아닐 수 없다.
87체제가 수명을 다함으로써 권력구조를 바꾸고, 소선구제와 선거제도의 개혁으로 거대양당에 의한 정당체제의 독과점 구조를 변혁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개혁으로 다당제가 된다하더라도 정당 내부의 문화가 바뀌고 정당이 제 역할을 하는 문제와는 별개일 수 있다.
정당 내부가 민주화되지 않음으로써 정당민주주의가 뿌리내지 못한다면 여전히 정당은 특정 계파나 소수에 의해 장악되고 공천을 의식하는 국회의원들은 헌법기관으로서의 기능보다 당의 실력자에게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정권의 성격과 여야에 관계없이 이러한 한국정당의 고질적 병폐의 원인이 한두가지 요인으로 환원되기는 어렵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공천제도이다. 2004년 상향식 경선이 도입되고 정착되는 듯 하였으나 정당의 총선 전략의 명분으로 외부 영입과 전략공천, 당 지도부의 의중이 반영되는 공천 관행이 지배적이며 이러한 추세는 더욱 강화되고 있다.
이는 주요 정치적 이슈와 여야의 논쟁에서 과격한 강경파 의원들의 목소리가 과대대표되는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국민의힘 당권을 가리는 전당대회의 룰이 당심 100%로 바뀐 것도 대통령과 가까운 주류그룹이 공천권 행사를 통해 당의 주도권을 행사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내각제 국가는 정당 기율이 강하고 대통령제 국가는 반대의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한국은 미국식의 순수 대통령제도 아니고, 유럽식의 내각제 국가도 아닌 혼합형 대통령제라는 애매한 권력 형태를 띠며 강한 정당기율을 가지고 있다.
정당의 기율이 강하고 중앙집중적 관료제의 형태를 띠는 한국의 정당문화 변화는 공천제도의 혁신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공천은 정치인들에게 가장 사활적인 제도이기 때문이다. 내년에는 또 다시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도입, 소선구제를 중대선거구로 바꾸는 제도개선 등이 이슈로 부상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제도가 제대로 도입된다면 승자독식의 현행 정치를 혁파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공천제도가 여전히 소수 그룹에 의해 장악된다면 근본적인 정치적 변혁은 기대할 수 없다. 정당민주주의는 공천제도의 개혁에서 비롯되어야 하고, 이는 정당이 문지기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다.
[최창렬 용인대 특임교수(ccr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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