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는 법원에만 한다, 성폭력 사망 유족에겐 안 한다’
사과 없이 “기억 안 나” 반복한 가해자…검찰, 무기징역 구형
2022년 7월15일 이후 ㄱ씨 가족의 삶은 멈춰 있다. ㄱ씨는 ‘인하대 성폭력 사망 사건’의 피해자다. 사건 발생 이후 다섯 달여 만인 12월19일 인천지법 형사12부(재판장 임은하) 심리로 열린 피고인 ㄴ씨의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ㄴ씨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ㄴ씨는 같은 학교 학생인 ㄱ씨를 학교 건물에서 성폭행하려다가 건물 밖으로 밀어 숨지게 한 혐의(성폭력범죄처벌특례법의 강간 등 살인)로 기소돼 재판받고 있다.
<한겨레21>은 12월19일 결심공판이 끝난 뒤 ㄱ씨 유가족을 만났다. 앞서 다섯 차례의 재판보다 이날 결심공판 시간은 훨씬 길어졌다. 피고인 신문이 오래 걸린 탓이다. ㄱ씨 아버지는 “5차 재판까지 아빠로서 도대체 뭘 해야 하나 자괴감이 있었는데 오늘 신문을 지켜보니 비로소 뭘 해야 할지 알 것 같은 심정”이라고 했다. 어렵게 언론 인터뷰를 결심한 것도 이 때문이다. 유가족이 언론에 입을 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끝까지 부모로서 책임을 다하고 싶다”고 말하는 ㄱ씨 유가족의 마지막 바람은 한 가지다. 가해자에게 마땅한 처벌이 내려지는 것, 이 사건이 “성폭력 범죄로 여성이 고통받는 사회에서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사례”로 남는 것이다. 유가족은 ‘학생이라, 초범이라, 술을 많이 먹어서’ 등의 이유로 성폭력 가해자의 감형이 이뤄지지 않기를 바란다.
“학생·초범·음주 핑계로 감형되지 않길”
이날 공판에서 검찰은 ㄴ씨가 사망을 초래할 위험이 있음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ㄱ씨를 성폭행하려다 사건이 발생했다며 ㄴ씨에게 “미필적 고의가 있다”고 주장했다. 재판 과정에서 현장검증 등으로 확인된 사실에 따르면, 범행이 일어난 장소는 건물 3층으로 8m 높이다. 창밖을 바라만 봐도 충분히 위험하다고 알아챌 수 있는 높이다. 게다가 ㄱ씨가 떨어진 창문은 바닥으로부터 1m6㎝ 높이에 설치돼 있다. 의식이 없는 사람이 혼자 힘으로 올라가기 어려운 위치다.
무엇보다 유가족은 추락 이후 ㄱ씨의 의식이 남아 있던데다 추락 장소가 해당 건물에서 밖으로 나가려면 반드시 지나칠 수밖에 없는 곳인데도 ㄴ씨가 바로 119 등에 신고하지 않은 점에 분통을 터뜨렸다. 추락 이후 쓰러져 있는 ㄱ씨에게 가까이 가지 않았다면 묻기 어려운 ㄱ씨의 혈흔이 ㄴ씨의 바지에서 발견됐다는 점, 사고 이후 ㄴ씨가 ㄱ씨의 아이패드를 가져가서 사고 현장에 두고 온 자신의 휴대전화에 메시지를 보냈다는 점 등에도 유가족은 의문을 품고 있다.
ㄱ씨 어머니는 “(현장검증을 해보니 떨어져 다친 사람을 보지 않고 해당 건물을 떠나기 어려운 위치인데) 어떻게 다친 사람을 보지도 않고 갔다고 얘기할 수 있는지, 어떻게 기억나지 않는다고, 모른다고만 얘기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라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도 “술 먹고 ‘기억을 못한다’고 말하면 무죄가 되지 않도록 끝까지 증명해나가고 학교에도 책임을 묻겠다”고 말했다.
ㄴ씨는 재판부에 19차례 반성문을 제출했다고 한다. ㄱ씨 유가족은 “오늘(12월19일) 있던 최후진술을 제외하면 (19차례의 반성문을 제출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우리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ㄴ씨가 재판 과정에서 가장 많이 반복한 말은 “기억나지 않는다”였다고도 했다.
사건 뒤 학교 대책은 ‘일회성 교육’뿐
실제로 ㄴ씨는 초기 경찰 수사에서 “(성폭행 시도 과정에서) ㄱ씨의 몸을 밀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지만, 이후 검찰 진술부터는 “(경찰 진술은) 수사기관의 유도에 의한 추측성 진술이었다” “사건 당시 만취 상태로 기억이 없다” “피해자가 추락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취지로 진술해왔다. 이날 결심공판에서도 “그러한 사실이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신이) 그러한 행위를 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는 답변으로 일관했다.
ㄱ씨 유가족은 학교 쪽의 미온적인 대처도 비판했다. 사건 이후 학교 차원의 제대로 된 대응책도 마련하지 않고 사과도 없었다는 것이다. 사건 이후 교육부와 인하대가 가장 먼저 내놓은 대책은 폐회로티브이(CCTV) 증설이다. 이후 특정 단과대 재학생만을 대상으로 일회성 성폭력 예방교육을 했을 뿐이다. ㄱ씨 유가족은 “(사건 이후) 학교 쪽에서 따로 연락이 온 적도 없다. 학내 성차별적인 문화나 학생 안전과 관련해서도 제대로 된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고 했다.
가해자 처벌은 이제 사법부의 몫이지만 재발 방지를 위한 고민과 대책 마련은 학교 구성원 모두의 일이다. 사건 이후 피해자에게 연대하는 목소리를 내온 인하대 페미니즘 동아리 ‘여집합’ 역시 유가족과 마찬가지로 학교 쪽의 소극적인 대처를 꼬집는다. 그동안 학내에서 단톡방 성희롱, 스토킹 범죄 등이 발생했을 때 학생들이 사용하는 ‘에브리타임’ 애플리케이션과 학교 커뮤니티 실명 게시판에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성 글이 올라왔지만 학교 쪽이 이렇다 할 대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집합’의 한 관계자는 “(그동안) 온라인 성폭력 교육 QNA 게시판에 ‘꼴페미’ 등 욕설이 올라와도 마땅한 대응을 안 했다. 학생자치기구 등을 중심으로 반성폭력 문화를 함께 얘기할 수 있는 분위기도 잘 만들어지지 않는데다 학내 성폭력 사건에 대한 대처 매뉴얼도 전혀 없다”고 말했다.
사건 이후 ‘평등하고 안전한 학교’를 요구하며 교내에 붙었던 대자보는 학교 쪽이 3시간이 채 안 돼 떼버렸다. ‘여집합’ 관계자는 “이번 사건을 애도하고 평등과 안전을 책임지는 건 유가족만의 몫이 아닌데 ‘왜 추모를 강요하냐’ ‘(인하대의) 입시 순위가 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식의 이야기가 (게시판 등에) 올라온다”며 “혐오적인 의견은 쉽게 퍼지고 추모와 대책을 이야기하는 글은 신고돼 사라진다”고 전했다.
1만5천 명 탄원 “사회 경종 울리는 판결 나와야”
‘여집합’은 결심공판에 앞서 85개 시민사회단체와 시민 1만5400명의 서명을 모아 가해자 엄벌과 정의로운 판결을 촉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탄원서엔 이렇게 적혀 있다. “이번 판결에선 우리 사회가 피해자와 유족이 겪은 아픔을 위로하고 동시에 피해자의 존엄한 삶을 기억하는 계기가 마련되길 기대합니다. 또 가해자의 엄한 처벌을 통해 여성 대상 강력범죄를 억제하는 계기가 마련되길 기대합니다. (…)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판결이 나오길 기대합니다.”
1심 판결 선고는 2023년 1월19일로 예정돼 있다. “(사건이 발생했으면) 제대로 된 대책이 있어야 하잖아요, 대책이….” ㄱ씨 아버지는 인터뷰 내내 이 말을 반복했다.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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