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직한 기후 비평서부터 따뜻한 요리 에세이까지… 마음 움직인 25권[북리뷰]

2022. 12. 23.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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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 올해의 책 - 외부 필진 5명이 각각 고른 ‘Top 5’

지난주 ‘올해의 책’에 이어 문화일보 외부 필진 5인이 취향과 사심을 담은 각자의 리스트를 다섯 권씩 보내왔다. 불평등과 혐오, 기후위기를 걱정하는 묵직한 비평서부터 고단한 일상을 보듬는 그림책, 요리를 통해 인생을 복습하는 에세이까지 다채롭다. 놀라운 건 다섯 명이 고른 스물다섯 권 가운데 중복되는 책이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 올 한 해도 그만큼 좋은 책이 많았다는 것, 여럿이 입 모아 추천하지 않아도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면 좋은 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리스트다. 풍성한 ‘올해의 책’과 함께 흘러가는 2022년을 돌아보시길. 그 안에서 다가오는 내년을 맞이할 희망의 길도 발견하시길. 북리뷰팀

■ 장은수 평론가

‘타자 철학’(반비)은 약자를 향한 혐오와 차별이 판치는 세상을 향한 우리 인문학의 가장 깊은 응답이다. 늙고 병들면 약자 됨(타자 됨)을 피할 수 없는 게 우리 운명이다. 냉대의 기운이 넘실대는 낯선 땅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목소리에 공명하지 않을 때, 우리는 결국 우리 자신의 건강을 배신하게 된다. ‘H마트에서 울다’(문학동네)는 어머니를 향한 강렬한 애도 일기다. 한국계 미국인인 저자는 주말마다 ‘엄마의 맛’을 요리해 먹으면서 어머니를 추억한다. 이 아름다운 에세이는 타자를 반복해서 내 안에 받아들이는 일이 우리 정체성을 이룩하는 가장 좋은 길임을 알려준다. ‘상용자해’(길)는 인생 반려로 삼을 만한 공구서다. 동양 갑골학의 성과를 집약한 이 책은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한자의 뿌리를 보여준다. 이 책에 따르면, 사랑(愛)은 ‘돌아보며 서 있는 사람’()과 ‘심장 모양’(心)을 나타내는 말이 합쳐진 형태다. 헤어질 때 여전히 심장에 고인 타자에 대한 감정이 곧 사랑이다.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김영사)는 현대의 가장 큰 심리적 질병을 드러낸다. 삶에 대한 증오, 자신마저 사랑할 수 없는 무능력이다. 흔히 우리는 쉴 새 없이 바삐 살아감으로써 자신이 여전히 삶의 주인이라는 감정을 드러내려 한다. 그러나 ‘가짜 노동’(자음과모음)에 따르면, 헛된 열정을 부릴수록 노동이 삶의 심장을 갉는 듯한 불안만 더 커진다. 건강해지려면 분주함보다 스스로 자기 삶을 돌보는 능력, 즉 내적 활동성을 회복해야 한다. 이를 위한 삶과 사회의 구조조정이 필요하다.

■ 하지현 건국대 교수

현대사회 특징은 청소년기가 확장된 것이다. ‘배움의 기쁨’(다산책방)은 나는 누구인가란 정체성 찾기를 잘 보여주는 책이다. 백인 어머니와 흑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나 백인 중산층들이 사는 동네에서 자라난 저자는 10대에 비로소 흑인의 규범을 내재화하면서 흑인다움에 몰두하다 돌아온다. 진짜 나를 인식하며 성인이 되는 과정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소리꾼 이자람의 공연을 보면 감탄을 내뱉게 된다. ‘오늘도 자람’(창비)은 일상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서히 쌓이는 축적의 힘의 무서움을 밀도 있는 필체로 보여준다. 그렇게 축적된 것들이 삶을 전혀 다른 곳으로 이끈다고.

문화에 따라 마음의 상태에 고유한 이름을 붙이게 된다. ‘당신의 마음에 이름을 붙인다면’(책읽는곰)은 그에 맞춘 어휘들을 알려준다. 식사를 마친 후에도 식탁에서 대화를 나누는 스페인의 소브레메사, 혼자 집에서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독일의 슈트룸프라이. 감정에 붙일 이름이 많아지는 만큼 내 감정의 폭도 넓어진다. 불안과 우울이 많아진 시대, 그건 거꾸로 보면 정상을 어느새 이상향으로 추구하게 된 세상의 반증이 아닐까. ‘정상은 없다’(메멘토)는 정신질환이 창궐하는 시대에 정상성을 먼저 고민하라는 역설적 제안을 한다. 여행작가 최갑수의 ‘음식은 맛있고 인생은 깊어갑니다’(얼론북)는 먹고 마시는 걸 빼면 허무한 인생일 뿐이라 말한다. 여행하며 접한 맛있는 음식을 소개하는 글귀 사이에 산전수전 겪어온 인생의 통찰이 맛깔나게 쓰여 있다. 조금씩 아껴가며 맛보는 잘 삭은 젓갈 같은 책이다.

■ 이정모 국립과천과학관장

일제강점기 시인 백석은 헤어져야 하는 가족의 슬픔과 서러움을 시 ‘수라’로 노래했다. 평소 명랑한 그림을 그리는 김정진은 시를 서정적인 그림책 ‘거미 가족’(꼬마이실)으로 재탄생시켰다. 고전을 그림책으로 이렇게 바꿔놓다니! ‘해녀의 딸, 달리다’(단비)는 같은 일제강점기 해녀들의 저항을 담은 청소년 문학작품이다. 이 작품의 미덕은 사실성이다. 아동 작가 이현서는 철저하게 고증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제주 구좌에서 벌어진 해녀들의 투쟁을 다룬다. 심각하지 않다. 하도리 별방진을 달리는 주인공은 평범하다. 거기에 등장하는 투사와 일제 앞잡이 그리고 일본인마저 이해하고 싶어지게 그렸다.

과학을 오락으로 즐기면서 지식을 덤으로 얻을 수는 없을까? 있다! ‘과학이 필요한 시간’(동아시아)이 바로 그런 책이다. 지금 과학 전선에서 일어나는 발견을 팟캐스트로 듣는 것처럼 읽을 수 있다.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부키)는 시행착오, 표절, 도용으로 가득한 생명 40억 년의 진화사다. 진화는 하늘에서 떨어진 작품이 아니다. 레고 블록과 같다. 이미 있는 것들을 조합하고 편집해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진화사 책이다. ‘판타 레이’(사이언스북스)는 단언컨대 한국 최고의 교양과학서다. 유체의 신비를 추적하다 보니 어느새 근대와 현대 과학사가 정리된다. 누리호 터보 엔진의 한 부분을 만든 공학자 민태기의 등장은 과학출판계에 보기 드문 행운일 것이다. 교양인의 탈을 썼다면 집에 한 권쯤 갖춰야 하는 책이다.

■ 한승혜 작가

최근 국내외의 사회·정치적 분위기에 있어서 여러모로 긴장이 고조된 느낌을 받는다. 마치 시한폭탄을 안은 듯한 기분이랄까. 그 때문인지 올해는 이런 긴장과 불안을 다루는 책을 인상 깊게 읽었다. ‘차이나 쇼크, 한국의 선택’(사이드웨이)은 한·중 양국이 얼마나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는지를 보여준다. 중국의 문화·역사적 맥락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함과 동시에 한국이 대중국 이슈에 얼마나 영리하고 거시적으로 대응해야 하는지를 시사한다. ‘이중작가 초롱’(문학동네)은 한국 사회 곳곳의 모순을 날카롭게 포착한 단편집이다. 자녀를 명문대에 보내기를 꿈꾸는 ‘진보 지식인’처럼, 예술과 문학조차도 차마 드러내 말하지 못했던 어둠을 놓치지 않고 이야기한다.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다’(은행나무)는 우리 사회가 직면한 분열과 갈등의 해결에 대한 실마리를 제시한다. 공감은 중요하지만 잘못된 공감은 때로 진영논리와 파시즘의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저자는 ‘엠퍼시’라는 개념에 착안해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려 애쓰되 거기에 매몰되지 않을 것을, 그러한 태도가 결국 우리 모두를 이롭게 할 것임을 역설한다. 생각 없이 내뱉은 한마디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은 심리상담사가 주인공인 장편소설 ‘경청’(민음사)은 모두가 연결된 것 같으면서도 고립감을 느끼기 쉬운 오늘날 진정한 소통이란 무엇인지 보여주며, 19세기 여성 작가들을 한 권의 방대한 책으로 묶어낸 ‘다락방의 미친 여자’(북하우스)는 고전 문학 작품을 통해 문화와 삶에 가부장제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이야기한다.

■ 장동석 평론가

인도 출신 작가 아미타브 고시의 ‘육두구의 저주’(에코리브르)는 오늘날 기후위기를 서구 제국주의의 시발점이 된 향신료인 육두구에서 찾는다. 기후위기뿐 아니라 극한으로 치닫는 비정한 인간의 모습, 다시 말하면 욕망으로 가득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책이기도 하다. 위기는 지구, 즉 물리적 환경이 아닌 곳에도 존재한다. 철학자 한병철은 ‘사물의 소멸’(김영사)에서 하늘과 땅이 아닌 구글 어스와 클라우드에 거주하는, 하여 존재 자체를 잃어가는 ‘지금, 여기’의 우리에 대해 염려한다. 엄청난 데이터를 저장하면서도 기억을 되짚지 않는 모든 것을 알려고 하면서도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는, ‘좋아요’를 연신 누르면서도 타자와 마주하지 않으려는 우리는 “유령 같은 세계”의 거주민이다.

‘한없이 가까운 세계와의 포옹’(동아시아)은 촉각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신체 접촉에 대한 거부감이 팽배한 시대임에도 저자는 “나쁜 것은 경직된 문화와 존중 없는 사람일 뿐, 신체접촉 자체가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연장선상에서 진화생물학자 장대익의 ‘공감의 반경’(바다출판사)도 주목할 만하다. 어떤 공감은 오히려 혐오와 분열을 낳는다. 장대익은 느낌적 느낌, 즉 감정을 넘어 사고의 공유를 이룰 수 있어야 공감의 반경이 넓어진다고 강조한다. 역사학자 황경문의 ‘출생을 넘어서’(너머북스)는 양반의 지배 아래서도 자신들만의 세계를 열어갔던 중인과 향리, 서얼 등 제2 신분집단의 변천사를 정리한다. 이들의 후손들은 열어간 한국 근대의 시간을 고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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