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돕고, 배우고, 사랑하도록 프로그래밍 됐다[북리뷰]
■ 블루프린트
니컬러스 A 크리스타키스 지음 | 이한음 옮김 | 부키
이시대 최고 ‘통섭의 대가’ 저자
선한 사회 이끄는 원동력 규명
우정의 유전자 갖고 태어난 인간
가족안서 협력·연대하는 법 배워
사랑 외면한 키부츠·셰이커교
유토피아 지향했지만 끝내 붕괴
브라이언 헤어의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로빈 던바의 ‘프렌즈’, 리디아 덴워스의 ‘우정의 과학’, 윌 버킹엄의 ‘타인이라는 가능성’….
몇 해 동안 쏟아진 다정한 우정에 관한 책 리스트다. 인류 진화의 열쇠는 ‘근력’이 아닌 ‘친화력’이며, 사랑과 환대가 정서는 물론 건강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려주는 책들. 이번 주 나온 ‘블루프린트’는 이 모든 책의 종합판 같은 연구서다. 저자인 니컬러스 A 크리스타키스 예일대 교수는 ‘통섭의 대가’로 불린다. 의사인 동시에 생태학자이고, 사회학자이자 데이터 과학자인 놀라운 이력 덕분에 붙은 별칭이다. ‘블루프린트’는 저자의 이력에 걸맞게 진화생물학과 인류학, 통계학과 심리학을 넘나들며 선한 사회를 이끄는 진화의 ‘청사진(blueprint)’을 펼쳐낸다.
책에 따르면 인간은 생후 3개월부터 사회생활에 필요한 감각을 터득한 뒤 5세 무렵에 접어들면 우정을 맺는 성향을 나타낸다. 다만 이때는 함께하는 놀이나 피상적 보상에 초점을 맞추지만, 9세 이후 성실과 신뢰 같은 추상적 개념을 통해 친구의 ‘의리’와 ‘허물’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친구를 사귀려는 충동이 강렬한 나머지 ‘상상 속 친구’를 만들기도 한다. 실제로 7세 아동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63%가 상상의 친구와 사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정이 ‘타고나는 성향’이라는 사실은 최신 유전학 연구에서도 드러난다. 저자가 일란성 쌍둥이 307쌍과 이란성 쌍둥이 248쌍의 우정 양상을 비교한 결과, 전자가 후자보다 연결망 구조가 비슷할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저자는 “유전자가 (우정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일란성 쌍둥이와 이란성 쌍둥이의 연결망은 별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우정의 유전자를 새기고 태어난 인간에게 협력하고 연대하는 감각을 익히도록 도와주는 최초의 집단은 가족이다. 진화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은 먼저 자녀를 사랑하도록 진화했고 뒤이어 짝과 친족, 친구와 타인에 애정을 느끼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른바 ‘짝 결속’에 기반을 둔 일부일처제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우리 조상은 약 30만 년 전까지 일부다처제 사회에서 살았으며, 인류 사회의 85%는 어느 시기에 일부다처제를 허용했다. 지금도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속하는 41개국에선 일부다처제가 용인된다. 저자는 이처럼 오랜 기간 광범위한 지역에서 일부다처제를 경험했음에도 일부일처제가 주류로 자리매김한 것 역시 진화를 추동한 ‘다정한’ 유전자와 관련 있다고 분석한다. 역사적으로 일부다처제 사회에선 배우자가 없는 남성의 폭력 발생률이 높았으나 일부일처제를 채택한 체제에선 지위가 낮은 남성도 위험을 회피하며 자녀를 키우는 일에 관심을 쏟을 확률이 커졌다는 것이다. “범죄와 갈등을 줄인 일부일처제는 일부다처제보다 경쟁 우위를 점했을 뿐 아니라 양성평등 사상이 부상할 무대를 마련했다.”
책은 ‘셰이커교’나 ‘키부츠’처럼 유토피아를 지향한 자발적 공동체가 끝내 붕괴한 이유를 ‘사랑 본능’에 대한 외면에서 찾는다. 17세기 말 영국에서 창시된 셰이커교는 신앙을 공유하는 우정의 결속을 강조하면서도 연애는 엄격히 금지했다. 남성용·여성용 계단을 따로 만들어 복도에서 마주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이런 금욕 관습이 아니었다면 셰이커교가 훨씬 널리 확산했을 것이라는 게 저자의 견해다. 이스라엘 공동체인 키부츠 역시 부모와 자녀의 유대 관계를 재편해 공동 육아 중심의 급진적 가족 구조를 지향한 탓에 명맥을 유지하는 데 실패했다.
책은 이 밖에 조난당한 난파선의 생존율을 가르는 차이, 갑자기 생긴 ‘공돈’ 분배에 관한 실험, 남극기지 대원들의 사회적 연결망 등을 탐구한 끝에 이렇게 단언한다. 인간은 전쟁을 감행할 정도로 서로 다르지만, 돕고 배우고 사랑하도록 ‘프로그래밍’된 본성엔 탄복할 만한 공통점이 훨씬 많다고. 그동안 이기심과 폭력성 같은 어두운 면에만 주목하느라 ‘밝은 면’은 너무 등한시했다고. 장구한 역사에서 자연선택을 통해 빚어진 본성은 갈등과 분열을 초래하는 부족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고. 저자의 말처럼, 30만 년 전 출현한 호모사피엔스가 지구를 지배하는 종이 될 수 있었던 건 ‘선함을 향해 휘어진 진화의 궤적’ 덕분이다. 720쪽, 3만3000원.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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