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닻 없이 표류하는’ 해외 입양인들의 삶, 하나로 만난 이야기

김다은 기자 2022. 12. 23.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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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부가 민간 외교이자 외화벌이 명목으로 해외 입양을 활용한 때가 있었다. 그때 떠난 한국계 입양인들이 자신들의 ‘진짜’ 이야기를 한다. 같은 입양인인 카오미 리 씨를 통해서다.
해외 입양인 팟캐스트 ‘어댑티드(Adapted)’ 제작자 카오미 리 씨. ⓒ시사IN 조남진

카오미 리. 한국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인 이름으로 불렸다. 생후 6개월인 그를 미국으로 데려온 양부모는 한국과 일본의 차이를 몰랐다. 친구들도, 이웃들도 그의 이름에서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1970년, 카오미 씨는 미국 미네소타주 작은 시골 마을의 유일한 유색인종이었다. 카오미 씨가 양어머니에게 자신을 입양한 이유를 물었을 때, 그는 “개발도상국의 인구과잉이 전 지구적인 문제라고 생각해서 가난한 나라였던 한국의 아이를 입양했다”라고 답했다.

당시 한국에서 아이를 입양해오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었다. 한국에는 ‘대리 입양’ 제도가 있었다. 입양 부모가 아이의 출생국가에 오지 않고도 대리인을 통해 입양이 가능했다. 일명 ‘우편배달 입양’이라 불리는 제도였다. 한국은 이 제도를 통해 1980년대에는 몇 년에 걸쳐 출생 아동의 1% 이상을 해외에 입양 보내기도 했다.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1958년부터 2021년까지 해외 입양을 간 아동은 16만8322명이다. 이 중에서도 미국은 한국의 가장 큰 해외 입양 시장이었다.

카오미 씨는 어머니와 가깝게 지내지 못했다. 대신 마음을 열었던 아버지에게 성적 학대를 당했다. 교회 목사였던 아버지의 평판과 부모의 관계를 위해 당시 열한 살이었던 카오미 씨는 비밀을 지켜야 했다.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불안, 양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는 그의 삶을 미궁 속에 밀어넣었다.

카오미 씨는 많은 해외 입양인들이 자신처럼 “닻을 내리지 못한 채 표류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해외 입양인들이 경험한 아프고 힘든 ‘진짜’ 이야기를 다뤄보기로 했다. 그렇게 팟캐스트 ‘어댑티드(Adapted)’가 시작됐다. 2016년 만들어진 어댑티드에 지금까지 한국계 입양인 120여 명이 출연했고, 15만명 넘는 청취자들이 방송을 들었다. 시민들의 모금으로 에피소드 32편을 한국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4년 만에 한국을 방문한 카오미 씨를 12월5일, 〈시사IN〉 편집국에서 만났다. 그의 다섯 번째 한국 방문이었다.

오랜만에 한국을 찾았다.

한국에 올 때마다 복잡한 마음이 들지만 그래도 더 가까워지는 느낌이다. 1995년에 처음 한국에 왔다. 그땐 언어도 통하지 않았고 아직 내가 한국이라는 곳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아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한국에 다시 올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마음으로 미국에 돌아갔다. 두 번째로 한국을 찾은 건 40대가 된 2015년이었다. 당시 서울에 열흘간 머물면서 한국의 문화와 음식을 접하고 사람들을 만났다. 따뜻함을 느꼈고 이곳을 무척 좋아하게 됐다. 부모님을 찾기 시작한 건 세 번째 방문부터다.

어떤 과정을 거쳤나?

나를 입양 보낸 홀트아동복지회(당시 홀트양자회)에 연락을 했다. 그곳으로부터 파일 몇 장을 받았지만 간단한 인적 사항만 적혀 있는, 양부모가 갖고 있는 것과 동일한 문서였다. ‘생후 11일 만에 평택시청 앞에 버려져 있었고 한국 이름은 이소라’라는 내용이었다. 이 이름이 내게는 엄마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실마리다. 내가 태어난 1970년에는 이런 한글 이름이 흔하지 않았다고 한다. 입양 기관에서는 대부분 한자로 이름을 짓기 때문에 이 이름은 엄마가 지어준 게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런 이름을 지어준 걸 보면 특별한 분이 아니었을까(웃음). 입양 기관을 방문한 뒤엔 경찰서와 시청, 주민센터 등을 찾아갔다. 내 출생 연도와 이름으로 나에 대한 단서를 더 찾아보려 했지만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 사진과 이름, 인적 사항들을 한국어로 번역한 전단지를 만들어 평택역 앞에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일이었다. 혼자 한국의 가족들을 찾기 위해 전단지를 돌리던 그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슬프고 힘들었다. 나 역시 이렇게는 부모님을 찾을 수 없다는 것, 희망이 없는 행동일 뿐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그 외에 다른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막막했겠다.

많은 해외 입양인들이 자신을 입양 보낸 홀트아동복지회나 한국사회봉사회(KSS)에 방문했을 때 나와 비슷한 일들을 겪는다. 이미 자료가 폐기됐다는 답을 듣거나, 엉성하게 작성된 서류 몇 장을 받거나, 과거의 입양아 단체사진이라도 기념으로 가져가라는 말을 듣는 식이다. 성인이 된 입양인들은 친부모와 함께 살길 원해서 혹은 그들을 원망하기 위해서 가족들을 찾는 게 아니다. 내 생일이 정확히 언제인지, 나를 낳은 분들은 어떤 사람인지, 내게 형제가 있는지, 내가 누구를 더 닮았는지 그런 기본적인 것들을 알고 싶은 거다. 나를 알려면 부모에 대해 알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부모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권리를 민간 양육기관에 빼앗겼다.

카오미 리 씨의 한국 이름(이소라)이 적힌 인적사항 서류. 그가 엄마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실마리라고 한다.

결국 출생에 대한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없었나?

6년 전 DNA 데이터를 수집하는 사이트에 내 DNA 정보를 올렸고 캐나다에 살고 있는 먼 친척과 연락이 닿았다. 여러 과정을 거쳐 큰아버지로 추정되는 분이 평택에 살고 있다는 것까지 알아냈다. 희망이 가까워졌다고도 느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분이 돌아가셨고, 남은 가족들은 내가 더 이상 연락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지난해 봄에는 DNA 사이트를 통해 덴마크에 입양돼 그곳에서 살고 있는 이복 자매와 연락이 닿기도 했다. 덴마크로 찾아가 그를 만났다. 아버지는 어떤 분일지, 아직 살아 있을지, 또 다른 형제들은 어떤 사람들일지 많은 상상을 나누고 돌아왔다.

‘과거는 잊고 지금의 삶에 만족하라’는 식의 말도 많이 들었을 것 같다.

한국계 입양인들에게 ‘혜택을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영어도 잘하고 미국이나 유럽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랐으니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참가한 게 아니다. 아시아인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스스로에 대한 부정, 낮은 자존감, 한국과 미국 사이에 ‘낀 존재’로 취급받을 때 느끼는 공허함 등 해외 입양인들이 느끼는 이 모든 감정과 경험은 입양된 그 순간에 한 번 일어나고 끝나는 게 아니라 만성적으로 삶을 지배한다. 좋은 가족을 만나고 재정적 지원과 교육을 받은 입양인들이라도 매번 책상 앞에 되돌아와 내가 누구인지 알려줄 단서를 찾아 끝없이 검색한다.

비슷한 경험을 들려줄 수 있나?

처음으로 ‘추석’에 대해 알게 됐을 때가 떠오른다. 그때 내가 40대였으니 태어나 40년 만에 처음으로 내 고향 나라의 명절 풍경을 알게 된 거였다. 추석이 되면 서울이 텅 비고, 사람들이 모두 가족과 고향에 대해 이야기하고, 햄과 식용유가 들어 있는 선물 상자를 들고 다닌다고 했다. 그때 내가 서울에 머물고 있었는데 평택까지 한 시간 조금 넘는 거리였다. ‘내 가족들은 너무나 가깝고도 먼 곳에 있구나’ ‘나는 그들을 알지 못하지만 지금쯤 한 손엔 선물 상자를 들고 다 같이 모여 식사를 하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아주 깊은 외로움과 슬픔이 느껴졌다.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아동 해외 입양은 정부와 무관하게 일어난 일이 아니다. 입양은 국가로부터 허가를 받은 입양 알선 기관에 의해서만 가능했다. 한국 정부는 우리를 해외로 보내고 나면 아마 우리가 사라질 거라고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없어지지 않았다. 해외 입양인들은 심지어 고아로 조작되기도 했다. 부모가 있는 아동은 잘 입양되지 않았기 때문에 서류를 조작해 이름 세 글자만 적어 우리의 정체성을 지운 것이다. 성인이 된 해외 입양인들은 자신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한국에 오지만 그들(입양 기관)은 ‘우리는 알려줄 게 없어’ ‘우리는 너희를 원하지 않아, 왔던 곳으로 돌아가’ 하며 우리를 문제 일으키는 사람으로 취급한다. 이것이 옳은 일인가? 지금의 정부가 이런 과거에 대해 지금이라도 책임을 지고 답해야 한다. 정부는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

피터 뮐러(한국명 홍민) ‘덴마크 한국인 진상규명 그룹’ 공동대표가 2022년 8월23일 서울 중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를 방문해 덴마크 해외 입양인 인권침해 조사 신청서를 제출했다. ⓒ연합뉴스

1950년대 전쟁고아를 구제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해외 입양은 1960년대부터 본격화됐고, ‘고아입양특례법(1961)’과 ‘입양특례법(1976)’ 등을 토대로 1970~1980년대에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홀트양자회(현 홀트아동복지회)와 한국아동양호회(현 대한사회복지회), 한국사회봉사회 등은 국가로부터 독점적 권한을 인정받으며 아동의 해외 입양을 주도했다. 특히 미국 기독교 부부들에게 입양을 알선하며 성장한 홀트양자회는 가장 많은 아동을 해외로 보내며 성장했다.

정부는 민간 외교이자 외화벌이라는 이유로 해외 입양을 적극 활용했다. 해외 입양이 가장 활발했던 1985년에 8837명, 1986년에 8680명의 아동이 해외로 보내졌다. 하루 평균 23명이 입양된 셈이다. 1988년 미국 월간지 〈프로그레시브〉는 “아기를 팝니다(Babies for sale)”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한국 입양 기관들이 입양 부모로부터 아동 한 명당 약 5000달러를 받고 있으며, 한국이 국제 입양으로 벌어들이는 돈은 1년에 1500만~2000만 달러에 달한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많은 해외 입양인들이 해외 입양 과정에서 일어난 인권침해 요소를 조사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한국계 덴마크 입양인 500여 명으로 구성된 ‘덴마크 한국인 진상규명 그룹(이하 DKRG)’을 통해 한국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조사를 요청했다. 조사 신청서를 제출한 DKRG의 공동대표 피터 뮐러 변호사는 지난 11월 팟캐스트 ‘어댑티드’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는 지난 8월부터 11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한국계 입양인 306명의 조사 신청서를 진실화해위에 제출했다. 특히 이들은 자신에 대한 정보를 스스로 찾을 수 있도록 개인의 입양 관련 문서를 한국 정부가 공적으로 관리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입양인은 안타깝고 불쌍한 사연으로 감정에 호소해야 할 때가 많다. 이번 조사 신청을 계기로 그런 호소보다 해외 입양의 역사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되어 반갑다.

한때는 ‘성공한 해외 입양인’ 이야기가 언론에 많이 보도되기도 했다. 새로운 국면이 열리는 것 같은데.

우리는 ‘디즈니랜드’에 온 게 아니다. 행복한 입양인 서사는 입양 기관과 양부모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다. 한국입양호보회를 설립한 한국계 미국인 스티븐 모리슨처럼 해외 입양을 ‘종교적 구원’처럼 설명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런 ‘입양 구원론’은 많은 해외 입양인들이 겪는 현실을 대변할 수 없다. 언론에서도 해외 입양인의 복잡한 현실을 단순화해서 보고 싶어 한다. 슬프고 어려운 이야기를 겉으로 보이는 삶의 성공만으로 판단하려 한다. 하지만 1970~1980년대에 입양된 해외 입양인들은 이제 40~50대가 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이 존중받기를 원할 뿐이다.

팟캐스트 ‘어댑티드’에서는 입양인들이 겪는 학대·차별·자해·자살 시도 등 내밀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해외 입양인 당사자 중에도 방송을 듣고 깜짝 놀랐다고 연락을 주신 분들이 있었다. 나는 그저 잘 듣고, 그들의 마음에 답하는 일을 할 뿐이다. 이들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은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이라는 것을 느낀다. 다행히 방송 전에는 긴장하던 출연자들도 ‘방송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나눈 후 치유가 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방송을 듣는 모두와 자신의 삶을 공유해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방송을 통해 끌어안고 있던 무거운 짐이 가벼워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내가 겪은 일들로 사람들에게 동정이나 연민을 받고 싶지 않다. 대신 힘을 가지고 말할 수 있기를 바라왔다. 많은 입양인들도 그런 마음일 거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해외 입양인들의 이야기를 계속 나눌 건가?

언제 방송이 끝날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많은 분들이 내게 연락을 준다. 이기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나 역시 우울하거나 힘들 때 방송을 들으면서 입양인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느낀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나를 본다. 우리가 서로에게 필요하다는 걸 느낀다. 한국에 있는 분들께 부탁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해외 입양인의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마음을 열어달라는 거다. 16만명 해외 입양인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왜 이런 역사가 있었던 건지 조금 더 관심을 가져달라. 여전히 모든 입양인들에게 한국은 자신의 일부다.

카오미 리 씨와 인터뷰를 마친 이튿날인 12월6일 진실화해위원회는 해외 입양 과정의 인권침해 사건을 조사하기로 결정했다. 조사 대상은 1960~1990년대 6개국에 입양된 입양인 34명이다. 진실화해위는 사전조사를 통해 ‘이들이 부모가 있음에도 고아 혹은 제3의 신원으로 조작돼 입양된 사실을 확인했으며, 입양 국가인 네덜란드 등의 국가조사위원회가 해외 입양 과정에 불법행위가 있었다는 점을 이미 밝힌 바 있어 해당 조사를 개시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김다은 기자 midnightblu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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