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긴 터널 속에서, 한겨레가 찾은 책 10선 [올해의 번역서]

한겨레 2022. 12. 23.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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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한겨레 ‘올해의 책’]
그래픽 동혜원 hwd@hani.co.kr, 게티이미지뱅크
‘역대 최악의 대선’과 정치의 실종, 끝날 듯 끝나지 않는 팬데믹, ‘세월호’를 겪고도 또다시 마주한 사회적 참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꺾어놓은 세계 평화와 공존의 비전, 갈수록 수위를 높여가는 미중 갈등과 언제 내려앉을지 몰라 위태로운 세계 경제, 코앞에 닥친 기후 위기에도 끝없이 유예되는 대응…. 여지껏 걸어온 길을 되돌아 보면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온 듯합니다. 문제는 고개를 돌려봐도 그 터널이 여전히 우리 앞으로 뻗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간절한 바람과 달리 ‘전환’은 그리 쉽게 오지 않을 듯합니다. 터널의 한가운데, 2022년 끄트머리에 서서 ‘올해의 책’ 스무 권을 꼽아봅니다. 한 해 동안 <한겨레> 책지성팀이 여러분께 소개하기 위해 꾸역꾸역 읽어낸 책들 가운데 국내서 10권과 번역서 10권을 골랐습니다. 저 끝에서 손짓하는 불빛까지는 못 되겠지만, 터널을 지나는 여러분의 머리에는 냉기를, 가슴에는 온기를 불어넣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봅니다.
한겨레 책지성팀

신자유주의 이후, 국가가 돌아온다

거대한 반격
포퓰리즘과 팬데믹 이후의 정치
파올로 제르바우도 지음, 남상백 옮김 l 다른백년

포퓰리즘 국면과 팬데믹을 거치며 주권, 안전, 보호, 돌봄 같은 가치들이 갈수록 주목받고 있다. 사회학자 파올로 제르바우도는 <거대한 반격>에서 글로벌, 세계화, 외주화 등 ‘외향정치’를 추구했던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동이 포퓰리즘 국면을 겪은 뒤 점차 ‘신국가보호주의’로 향해가고 있는 거대한 흐름을 포착해 제시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신자유주의가 지워버렸던 “정치공동체의 장소적·영토적 성격”의 귀환, 그러니까 국가와 주권·보호·통제 같은 ‘내향정치’의 가치들이다. 이는 좌·우파 모두에게 주어진 조건으로, 좌파는 우파의 ‘유산자 보호’에 맞서 ‘사회 보호’를 추구해야 한다 주장한다. 최원형 기자

플랫폼 자본주의가 만드는 디스토피아

노동자 없는 노동
플랫폼 자본주의의 민낯과 미세노동의 탄생
필 존스 지음, 김고명 옮김 l 롤러코스터

디지털 기술을 앞세운 플랫폼 자본주의는 인간의 노동이 필요없는 세상이 곧 도래할 듯 군다. 그러나 영국의 대안적 싱크탱크 연구원이 쓴 책 <노동자 없는 노동>은 정작 우리가 우려해야 할 것은 ‘노동 없는 세상’이 아니라 ‘노동자 없는 세상’이라고 말한다. 책은 단돈 몇 푼으로 사진 속 개와 고양이를 분간하는 등의 파편화된 작업을 수행하며 알고리즘을 교육시키는 ‘미세노동’의 세계를 탐사한다. 자본은 공식 경제 영역에서 밀려난 잉여인구를 노동자 보호 수단들이 제거된 비공식 경제 영역으로 내몰고, 아예 이를 표준으로 삼고 있다. 이것은 과연 누구의 천국이고, 누구의 지옥인가? 최원형 기자

인간 의식을 진화로 설명해내기

박테리아에서 바흐까지, 그리고 다시 박테리아로
무생물에서 마음의 출현까지
대니얼 데닛 지음, 신광복 옮김 l 바다출판사

과학과 철학을 가로지르며 끊임없이 ‘의식의 문제’를 파고들어왔던 대니얼 데닛이 자신의 50여년 연구를 종합한 결정판. 박테리아처럼 단순한 움직임만 있는 세계에서 어떻게 천재 작곡가 바흐와 같은 인간의 마음이 탄생했을까 묻는다. ‘심신이원론’으로 오랫동안 이 문제를 풀기 위한 길을 가로막아온 ‘데카르트 중력’에서 벗어나, 지은이는 인간이 자연선택의 연쇄 속에서 유전적 본능에 근거하지 않은 행동방식(‘밈’)을 유전해온 궤적에 주목한다. 정보의 축적, 재생산, 전달을 가능하게 하는 언어가 인간 의식과 문화의 중심에 있는데, 지은이는 이 또한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시스템으로 풀어낸다. 최원형 기자

서로 ‘물어 죽이는 축제’로의 초대

분해의 철학
부패와 발효를 생각한다
후지하라 다쓰시 지음, 박성관 옮김 l 사월의책

일본 농업사학자 후지하라 다쓰시가 쓴 <분해의 철학>은 ‘여지껏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책’이다. 인간의 입맛대로 규정되지 않는 자연 속에서 ‘분해’란 도대체 무엇인가 묻는 철학을 전개하는데, 인간이 오랫동안 무시하거나 은폐해온 분해를 이 세상에서 가장 근본적인 작용으로 바라봄으로써 오직 생산과 소비에만 몰두해온 근대 문명을 비판한다. 환경이나 생태, 지속가능성 같은 개념에는 자연을 인간의 입맛대로 이상화하려는 태도가 드러나곤 한다. 그러나 분해를 중심에 놓는 사유는, 일말의 인간중심주의마저 털어내고 ‘무정한’ 이 세계를 바로 볼 수 있도록 새로운 시야를 열어준다. 최원형 기자

내년에도 여성은 난소보다 자궁보다 더 큰 우주

완경선언
팩트와 페미니즘을 무기로 내 몸과 마음을 지키는 방법
제니퍼 건터 지음, 김희정·안진희·정승연·염지선 옮김 l 생각의힘

“완경을 둘러싼 침묵과 수치심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 팩트와 페미니즘을 장착할 것을 요구한다.” 이런 선언이 요구되기까지 완경은 “폐경”으로 불리었으며 고갈과 상실의 결과였을 뿐이다. 1812년 ‘완경기’라는 용어가 등장했음에도 출산도구로 여성을 취급하는 남성지배적 사고가 견고한 탓인데, 모성사회일지언정 발기부전을 두고 “페니스가 ‘닳디 닳아서 못 쓰게 됐다’”고 했겠는가. 올해도 철학, 인문사회, 운동으로서의 페미니즘 서적이 적지 않았다. 그 가운데 <완경선언>은 몸이 곧 의식이고 언어이며 사회를 구성하는 단위임을 새삼 자각시키고, 동성집단 내에서도 약자가 되는 중년의 여성을 뷰파인더 한가운데 두고 있다는 점에서 올돌하다. 임인택 기자

아름답고 단단하고 오만한 장애인의 전보

우리의 사이와 차이
얀 그루에 지음, 손화수 옮김 l 아르테

당장 보도블록 턱, 당장 지하철 무승차 대응과 다퉈야 하는 한국의 장애 가진 사람에겐 실로 먼 책. 물을 한잔 뜨러 갈 때도 동선, 지점마다 수반되어야 할 자신의 체위, 동작을 매양 계산하고 외고 저자가 그것을 책 세 쪽에 걸쳐 복기할 수 있는 이유는 언어학자라서가 아니다. 휠체어 장애인이기 때문이다. 노르웨이 출신 대학 교수인 얀 그루에가 장애를 가진 ‘사람’으로 갈망하는 자유는 영원불멸의 테제가 아니다. 그는 당장의 감각, 당장의 자유, 당장의 존재이길 바란다. 한국과는 멀어도 결국 당도할 수밖에 없는 얘기. 아름답고 단단한, 심지어 오만한 문장으로 가득하다. 노르웨이 예술학교 교수이기도 한 손화수씨의 번역에 힘입었다. 임인택 기자

10년 번역으로 잃어버린, 그리고 ‘되찾은 시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l 민음사

모른다는 이는 없어도 읽었다는 이는 많지 않은 프랑스의 대표적 고전. 비의지와 의식의 교차로 오랜 기억을 복원하며 작가 스스로의 소명을 ‘간증’해가는 과정이 실로 유장하고 난해하기 때문이다. 1950년대 판본이 국내 소개되어 오다 1987년 프랑스 플레이아드 전집(7편)을 저본 삼아 김희영 한국외대 교수와 민음사가 2012년 ‘스완네 집 쪽으로’(1·2권)를 옮겨 펴낸 후 꼬박 10년에 걸쳐 올해 말 마지막 편 ‘되찾은 시간’(1·2권)까지 모두 13권으로 완역 기획의 대장정을 마쳤다. 김 교수는 독자와의 거리를 줄이기 위해 직역 위주로 “원문의 떨림을 전달하는 데” 애쓰면서 세세한 주석과 각 편마다의 해설로 시대 배경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 임인택 기자

미·중 갈등의 본질을 꿰뚫다

제국의 충돌
차이메리카에서 신냉전으로
훙호펑 지음, 하남석 옮김 l 글항아리

미국과 중국 사이 이른바 ‘제국의 충돌’을 분석할 때 가장 흔하게 쓰이는 틀은 ‘신냉전’으로, 이는 민주주의 체제와 권위주의 체제 사이 불가피한 이데올로기 대립을 전제로 삼는다. 홍콩 출신 사회학자 훙호펑의 책 <제국의 충돌>은 미·중 갈등의 실체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게 해줄, 더 넓고 깊은 시야를 제공한다. ‘차이메리카’라 불렸던 과거 미·중 공생 시기에도, 오늘날 갈등 상황에도, 언제나 그 핵심에 있는 것은 ‘자본 간 경쟁’이다. 지정학적 충돌이란 현상 너머에 있는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면, 그에 대한 우리의 대응 역시 과녁을 제대로 맞추지 못할 것이다. 최원형 기자

근대 정치사상의 다리를 놓은 중세의 고전

평화의 수호자
파도바의 마르실리우스 지음, 황정욱 옮김 l 길

마르실리우스는 서양 고대 사상과 근대 사상 사이에 다리를 놓은 중세 후기 정치철학자다. <평화의 수호자>는 마르실리우스 정치사상이 집결된 저작이며 근대 인민주권 사상의 원천이 된 고전이다. 마르실리우스의 근본 관심은 교황과 황제라는 이중권력이 서로 싸우는 상황에서 어떻게 평화를 찾아낼 것인가에 있다. 이 책은 교회 권력을 세속 권력에 복속시키는 방식으로 정치권력을 단일화할 때 평화가 실현될 수 있다는 논리를 편다. 나아가 세속 권력의 단일성을 입증해 가는 과정에서 모든 권력의 토대를 ‘인민’ 또는 ‘시민 전체’에서 찾는다. 이 발상에서 인민주권과 사회계약이라는 근대 정치사상의 원리가 자라났다. 고명섭 선임기자

포스트모더니즘 논란 일으킨 그 책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 문화 논리
프레드릭 제임슨 지음, 임경규 옮김 l 문학과지성사

미국 문화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의 1991년 저작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 자본주의 문화 논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지식계를 휩쓰는 데 동력 노릇을 한 책이다. 이 책을 통해 포스트모더니즘은 20세기 후반 미국 대중문화를 넘어 현대 자본주의 문화 전반을 설명하는 용어로 올라섰다. 제임슨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발전에 적용한 변증법적 방식을 끌어들여, 포스트모더니즘을 후기자본주의가 낳은 필연적인 문화 양식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진보이자 파국’으로 보는 관점을 제시한다. 그러나 제임슨의 포스트모더니즘론은 ‘백인 남성’의 관점에서 나온 서구중심주의적인 이론이라는 탈식민주의 진영의 공격에 직면했다. 고명섭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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