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긴 터널 속에서, 한겨레가 찾은 책 10선 [올해의 국내서]
‘역대 최악의 대선’과 정치의 실종, 끝날 듯 끝나지 않는 팬데믹, ‘세월호’를 겪고도 또다시 마주한 사회적 참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꺾어놓은 세계 평화와 공존의 비전, 갈수록 수위를 높여가는 미중 갈등과 언제 내려앉을지 몰라 위태로운 세계 경제, 코앞에 닥친 기후 위기에도 끝없이 유예되는 대응…. 여지껏 걸어온 길을 되돌아 보면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온 듯합니다. 문제는 고개를 돌려봐도 그 터널이 여전히 우리 앞으로 뻗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간절한 바람과 달리 ‘전환’은 그리 쉽게 오지 않을 듯합니다. 터널의 한가운데, 2022년 끄트머리에 서서 ‘올해의 책’ 스무 권을 꼽아봅니다. 한 해 동안 <한겨레> 책지성팀이 여러분께 소개하기 위해 꾸역꾸역 읽어낸 책들 가운데 국내서 10권과 번역서 10권을 골랐습니다. 저 끝에서 손짓하는 불빛까지는 못 되겠지만, 터널을 지나는 여러분의 머리에는 냉기를, 가슴에는 온기를 불어넣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봅니다.
한겨레 책지성팀
불평등은 세대를 가로지른다
그런 세대는 없다
불평등 시대의 세대와 정치 이야기
신진욱 지음 l 개마고원
586, 엠제트(MZ), 이대남 등 손쉬운 세대론이 난무하는 시기, 사회학자 신진욱 중앙대 교수는 <그런 세대는 없다>에서 ‘기성세대 대 청년’이라는 세대불평등 담론의 허구성을 작심하고 파헤쳤다. 청년과 기성세대의 현실, 사회경제적 지위의 대물림 등을 깊이 들여다본 지은이는 같은 세대라 해도 결코 동일한 속성을 공유하지 않으며, 핵심 문제는 ‘세대 간 불평등’이 아니라 ‘세대 내 불평등’이라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세대를 가로질러 발생하는 불평등의 실체를 호도하여 세대 사이의 불평등인 양 허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누구인가? “대립의 담론이 지워버린 현실의 삶들”을 직시하기 위한 길을 열어준다. 최원형 기자
성명미상의 삶을 아프게, 웃기게, 놀랍게
이중 작가 초롱
이미상 지음 l 문학동네
올해 ‘단 하나의 소설책’으로 꼽을 만하다. 성명미상의 사람들을 서사 복판에 세운다는 의지의 필명으로, 2018년 문단에 내놓은 첫 단편 ‘하긴’(2019년 젊은작가상)부터 올 상반기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까지 전체 8편을 엮은 이미상 작가의 첫 소설집. 386세대의 허위, 좌절 따위를 자식세대와의 관계를 통해 통렬히 은유하고, 이른바 엠제트(MZ)세대가 중층적 분절적으로 겪는 실존, 윤리의 무게 등을 ‘리드미컬’하게 다뤄낸다. ‘하긴’의 첫 단락엔 “이름이 거하면 인생이 이름에 잡아먹힌다”는 문장이 박혀 있다. 전체 주제를 추리자니 거해졌을 뿐, 작가적 명분이 아닌 이름 없는 자들의 실체적 형상을 이미상은 웃기게, 아프게, 빗대고 내치듯 그린다. 이 소설들이 과연 온전히 국외번역될 수 있을까. 임인택 기자
한국 정신사 ‘화쟁 전통’ 세운 원효의 진면목
원효의 발견
남동신 지음 l 사회평론아카데미
남동신 서울대 교수가 쓴 <원효의 발견>은 우리 역사상 최고의 불교사상가로 꼽히는 원효의 생애와 저술과 사상을 두루 깊숙이 파헤쳐 들여다본 책이다. 지은이는 새로운 시각으로 본 원효상을 과감하고도 면밀하게 그려낸다. 이 책이 공들여 구명하는 것은 원효의 핵심 사상인 ‘일심’과 ‘화쟁’의 본뜻이다. <대승기신론 소‧별기>와 <금강삼매경론> 같은 대표 저술에서 원효는 중관사상에 머무르지 않고 유식사상을 끌어들여 서로 회통시켰다. 이때 회통의 근거가 된 것이 ‘일심’이다. 원효는 7세기 후반 동아시아를 휩쓴 신역‧구역 갈등을 일심 사상으로 극복함으로써 한국 정신사의 화쟁 전통의 첫머리를 장식했다. 고명섭 선임기자
‘빨치산’ 아버지의 보편성 부각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l 창비
정지아는 빨치산 출신 부모와 자신의 이야기를 쓴 ‘실록’ <빨치산의 딸>로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신춘문예로 등단하기 한참 전이었다. 등단 뒤에도 중단편소설들에서 부모 이야기를 꾸준히 썼던 그가 처음으로 쓴 장편소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장례식 사흘을 배경으로 아버지의 지난 삶과 그가 관계 맺었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뭉클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들려줘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작가는 <한겨레>에 기고한 글에서 이 소설을 두고 “가벼워지니 널리 보이고, 널리 보이니 많은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빨치산’이라는 특수성보다 ‘아버지’라는 보편성이 더 중요한 소설”이라고 자평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선공후사’ 헌걸찬 정신 돋보여
시대인, 소명에 따르다
정수일 지음 l 아르테
‘간첩 깐수’로 세상을 놀래킨 문명사가 정수일이 미수(88살)를 맞아 통일과 문명교류학 정립에 바친 평생을 회고록으로 풀어냈다. 얄팍하고 각박하기만 한 시절, ‘나’보다는 시대와 역사, 민족을 앞세우는 선공후사의 정신이 돋보인다. 신생 중국의 전도유망한 외교관 자리를 박차고 통일 사업에 몸 바치겠다며 ‘환국’을 결단한 일에서부터, 간첩 활동으로 들어간 감옥에서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그곳을 연구실 삼아 책을 읽고 원고 집필에 매진한 기개, 출옥 뒤 지구 곳곳을 누비며 실크로드학과 문명교류학의 현장을 확인한 실증 정신, 북과 남 두 부인과 딸들에 얽힌 개인적 회한을 두루 만날 수 있다. 최재봉 선임기자
‘샌프란시스코 체제’ 낱낱이 파헤치다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서
동아시아 냉전과 식민지‧전쟁범죄의 청산
김영호 외 지음 l 메디치미디어
올해는 전후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규정한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구축된 지 70년 되는 해였다. 샌프란시스코 체제란 전범국 일본이 미국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성립한 체제를 말한다.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서>는 이 조약에 내장된 문제들과 이 체제가 일으킨 문제들을 낱낱이 밝힌다. 조약 체결로 일본은 미국의 핵심 동맹국이 됐고 전쟁범죄자 대다수가 면죄부를 받았다. 역사 문제와 영토 문제를 묻어버림으로써 심대한 후유증을 낳은 것은 더 큰 문제다. 이 책은 한‧중‧일 시민이 힘을 모아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낳은 시대 역행을 저지하고 ‘동아시아 공동체’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고명섭 선임기자
우리 시대에 빛 던지는 ‘주역 강해’
도올 주역 강해
김용옥 지음 l 통나무
<도올 주역 강해>는 철학자 김용옥 전 고려대 교수가 쓴 <주역> 해설서다. 지은이는 지난 2천여년 동안 동아시아에서 탄생한 주요한 <주역> 해석을 바탕에 깔고서 이 난해한 책을 오늘의 언어로 바꾸어 우리 시대를 이해하는 데 빛을 주는 책으로 빚어낸다. <주역>은 우주 만물과 인간 세계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책이자 그 변화를 점치는 책이다. <주역>에는 깊은 ‘우환의식’이 배어 있다. 세상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그 실존의 한계상황에서 하늘에 뜻을 묻는 것이 점이었다. 사사로움을 넘어선 물음이었기에 역에 대한 해석을 통해 윤리학적‧형이상학적 사유가 자라날 수 있었다. 고명섭 선임기자
‘사랑의 윤회’를 믿는다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진은영 지음 l 문학과지성사
진은영 시인이 10년 만에 내놓은 네번째 시집. “사랑의 윤회를 믿는” 시인은 이전 시집들에서도 줄기차게 사랑을 노래해왔다. 다소 난해할 수도 있는 그의 시들이 그럼에도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는 비결이 바로 거기에 있다 하겠다. 시집 제목에서 보듯, 그는 새 시집에서도 매력적인 사랑의 노래를 들려준다. 또한 이 시집은 2014년 세월호 충격 이후 그가 처음 내놓는 것이어서, 그 참사가 남긴 상흔과 그것을 넘어 앞으로 나아가려는 안간힘 역시 시집에는 역력하다. “스무 살도 못 되게, 너무 조금 곁에 머물러서 미안”(‘그날 이후’)이라 아빠에게 말하는 예은이의 생일시는 많은 독자를 울렸다. 최재봉 선임기자
깻잎 한 장에 담긴 이야기
깻잎 투쟁기
캄보디아 이주노동자들과 함께한 1500일
우춘희 지음 l 교양인
크고 작은 제조업체는 물론 농업과 어업 같은 1차산업 현장에서도 이주노동자의 존재가 필수적이게 된 지도 벌써 오래다. 2020년 겨울 캄보디아 이주노동자가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숨진 사건은 그런 현실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이 책은 사회학자인 지은이가 참여 관찰 방식으로 기록한 최초의 농업 이주노동자 연구서다. 지은이는 크메르어를 배우고 캄보디아 현장 연구를 거쳐 직접 깻잎 밭에서 일하며 이주노동자들과 ‘사업주’인 농민들을 만났다. 이주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 조건과 인권침해, 농촌의 변화, 고용허가제의 불합리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밥상 위 깻잎 한 장에 이토록 많은 이야기가. 최재봉 선임기자
‘0원살이’ 2년이 알려준 자유
0원으로 사는 삶
나의 작은 혁명 이야기
박정미 지음 l 들녘
온통 돈으로 굴러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쓰지 않는 삶이 가능할까. 이 책의 지은이는 그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더 매력적이라고 말한다. 시작은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워킹 홀리데이로 떠난 영국에서 해고를 당하고 빈털털이가 된 뒤 고민 끝에 ‘0원 살이’를 결심했다. 유기농 농장에서 일을 하며 자급자족하는 ‘우핑’과 더 엄격한 노동 공동체 등을 거쳐, 런던의 빈 배와 빈 건물에서 지내며 대형 마트의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재고 음식물로 배를 채웠다. 히치하이킹으로 유럽 각국과 인도까지 여행하면서 돈이 아닌 사람에게 의존하는 삶을 깨우친 그는 지금 지리산의 빈집에서 살고 있다. 최재봉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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