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발언대] "치과 기공소 해외진출 발판 될래요"
국내외 기공소-치과의사 연결…연 5조원대 시장 공략 시동
(서울=연합뉴스) 박세진 기자 = 치과병원에 가면 흔히 듣는 용어가 기공물(技工物)이다. 영구치를 뽑아낸 자리에 심는 인공치아 임플란트(Implant)를 덮는 왕관 모양 금속인 크라운(Crown)이나 빠진 이의 양옆 치아를 묶어주는 브릿지(Bridge) 같은 보철물을 말한다.
세계적인 인구 고령화와 생활 수준 향상으로 치과시장 확대와 더불어 기공물 시장이 급속도로 커지고 있다. 연간 글로벌 시장 규모가 2020년 40조원을 넘어선 데 이어 2026년에는 55조원대로 팽창할 것이라는 게 해당 업계의 전망이다.
이런 추세에 발맞춰 품질 좋고 가격 경쟁력이 높은 다른 나라의 기공소에 제작을 맡기는 글로벌 아웃소싱 시장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매년 10% 이상씩 커지는 기공물 아웃소싱 규모는 재작년에 5조원대였던 것으로 추산된다.
헤리바이오(HERIBio)는 국경을 넘는 기공물 아웃소싱 분야에서 공급자와 수요자를 연결해 주는 플랫폼으로 2019년 9월 닻을 올린 스타트업이다.
기술력과 가격경쟁력이 뛰어난 국내외 기공소(공급자)와 전 세계 치과의사(수요자) 사이의 거래를 온라인으로 중개하는 것이 주요 사업 모델이다.
아직 걸음마 단계로 볼 수 있는 지금은 사업 기반을 다지기 위해 공급자로는 실력이 검증된 한국 기공소를 앞세워 서비스를 제공한다.
미국, 베트남 등지의 해외 기공소 몇 곳은 현재 등록 절차를 밟고 있다.
지난 13일 서울 강남대로에 있는 헤리바이오 사무실에서 유진용(51) 대표를 만나 창업 동기와 기공물 아웃소싱 시장 동향에 관한 얘기를 들어봤다.
3D 디지털 스캐너 보급으로 가능해진 서비스
유 대표는 온라인을 통해 전 세계로 기공물을 주문하는 것이 모든 치과 의사가 꿈꾸던 일이라고 말했다.
국경을 넘는 거래가 간편한 절차로 쉽게 이뤄지면 품질 좋은 제품을 더 저렴하게 손에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현실화하는 데는 장벽이 많았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걸림돌은 보철물 제작에 필요한 일련의 과정을 오프라인으로 진행해야 하는 점이었다.
실제로 과거에는 치과병원에서 환자 치아의 본을 떠 기공소에 전달하는 방식으로 모든 보철물이 제작됐다.
그런데 다루기 쉽고 정확도가 높아진 3D(3차원) 디지털 구강 스캐너가 치과병원에 속속 보급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스캔 작업으로 만든 보철물 설계 파일을 활용할 수 있게 되면서 주문자(수요자)와 제조업자(공급자) 사이의 지리적, 물리적 장벽이 사라진 것이다.
유 대표는 탁월한 기공 실력을 갖추고 가격 경쟁력까지 확보한 한국 기공 업계 입장에선 수요가 많고 공급가격이 높은 해외시장으로 진출할 기회가 그만큼 늘어났다고 설명했다.
헤리바이오가 이러한 시장 환경 변화에 주목해 개발한 것이 전 세계 치과의사들과 기공소를 연결하는 중개 플랫폼인 '헤리투고'(HERi2go)다.
유 대표는 '디지털 덴티스트리'(digital dentistry)로 불리는 치의학 분야의 디지털화가 헤리투고 탄생의 토양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모던덴털그룹(중국)이나 댄디(미국) 같은 세계 유수 기공소들이 온라인 주문 시스템을 운영하지만 전 세계 치과의사와 기공소를 잇는 오픈 플랫폼으론 헤리투고가 첫 사례일 것이라고 말했다.
헤리투고의 '투 고'(To Go)는 식당에서 주문할 때 가져갈 수 있도록 포장해 달라는 의미로 쓰이는 말이다.
질 좋은 기공물을 저렴한 가격으로 세계 곳곳의 수요처(치과병원)에 보내주겠다는 의지를 반영한 서비스 이름인 셈이다.
창업 토대 된 건 한국 기공사의 뛰어난 기술력
헤리바이오를 창업한 유 대표는 중앙대 대학원에서 컴퓨터 비전을 공부한 뒤 삼성SDS 소프트웨어(SW) 사업팀에서 일한 경력을 갖고 있다.
공동창업자이자 CT0(최고기술책임자)인 엄상호 원장은 치과병원을 운영하는 25년 경력의 현직 의사다.
유 대표는 보철과 전문의인 엄 원장을 통해서 국내 치기공사들이 뛰어난 기술을 갖고 있지만 물리적 제약 때문에 해외 시장에 제대로 진출하지 못하는 현실을 알게 됐다.
마침내 두 사람은 자기 전문 분야에서 쌓은 경험을 살려 이 문제를 풀어볼 방안으로 IT와 치의학 기술을 융합하는 실험에 나섰다.
그 결과물로 치과의사들이 임플란트를 검색할 수 있는 앱인 닥터헤리(Dr.HERi)를 2020년 11월 출시한 데 이어 기공물 제작 중개 글로벌 플랫폼인 헤리투고(HERi2go)를 선보였다.
작년 12월부터 시범 서비스를 시작한 헤리투고는 올 5월부터 본격 운용에 들어갔다.
지금까지 국내 기공소 20여 곳이 이 플랫폼에 들어왔고, 100여 곳에 달하는 국내외 기공소가 입점 심사를 받고 있다.
기공물 수요자인 해외 치과병원으로는 미국을 중심으로 150여 곳이 등록했다.
헤리바이오는 약 30만 명의 치과의사가 활동하는 미국, 독일, 프랑스, 호주 등 4개국을 우선 개척할 시장으로 분류해 놓고 있다.
"한국 기공사들은 정규대학 과정으로 치의학 관련 기초학습을 마치고 국가 면허시험을 거쳐 자격증을 따기 때문에 다른 어느 나라 기공사들보다 실력이 뛰어납니다. 한국인 특유의 손재주와 실력을 해외 치과의사들도 인정하고 있어요."
유 대표는 풍부한 인적자원을 보유한 한국 기공 산업의 세계화에 기여하겠다는 생각으로 개발한 것이 헤리투고라고 거듭 강조했다.
치과의사·기공사 의견 반영한 사용자 환경
헤리투고를 통한 거래 흐름은 무엇보다 사용자 환경이 단순한 것이 장점으로 꼽힌다.
헤리투고 회원으로 등록한 전 세계 치과의사들은 플랫폼에 들어온 기공소 가운데 평판, 가격, 사용자 후기 등을 보고 거래할 곳을 선택한 뒤 치아 본이 담긴 스캔 파일과 주문서를 온라인으로 보내면 주문 절차가 끝난다.
해당 기공소는 주문에 맞춰 제작한 기공물을 멸균·진공 상태로 포장해 DHL 또는 페덱스(Fedex) 편으로 배송한다.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 대부분 지역에서 주문한 기공물을 받는 데 걸리는 기간은 평일 기준으로 7일 이내라고 한다.
주문자는 세계 어느 곳에서나 제작 진행 상황을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기공물을 시술한 후엔 평가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유 대표는 수많은 국내외 치과의사와 기공사들이 내놓은 의견을 토대로 기공물을 쉽고 편리하게 주문할 수 있는 사용자 환경을 조성한 것이라고 말했다.
헤리바이오는 주문자가 이런저런 이유로 반품을 요청할 경우에는 기존 기공물을 폐기토록 한 뒤 새로 만들어 보내 준다.
유 대표는 디지털 스캔으로 정확도가 높아져 재제작 발생률 자체가 낮다며 전체 기공 비용의 70% 이상을 스캔 파일 디자인 작업이 차지해 재제작을 하더라도 비용 부담이 크지 않다고 설명했다.
치과 종합 플랫폼 도약 목표
창업한 지 만 3년이 지났지만 이제야 첫걸음을 뗀 단계라고 자평하는 헤리바이오는 올 1월 뉴욕지사를 개설하는 등 미국 시장 개척에 공들이고 있다.
전체 기공 물량의 30% 이상을 해외에 주문하는 미국은 약 20만 명의 치과의사가 환자를 보는 세계 최대 시장이기 때문이다.
지난달 뉴욕에서 열린 치의학 전시회(GNYDM 2022)에 다녀온 유 대표는 미국의 대형 치과 체인인 하틀랜드와 아스펜 소속 의사들을 만나 협업 방안을 모색했다고 말했다.
헤리오바이오는 미국의 디지털 구강 스캐너 및 임플란트 제조업체 등과 공동 마케팅에 나서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유 대표는 미국을 출발점으로 삼아 전 세계로 시장을 넓혀 나간다는 복안을 갖고 있다.
출범 초기에 기공물 중개에 초점을 맞춘 사업 영역은 치과의사 대상의 온라인 강의(tutor), 치과 기자재 공급(mall) 등으로 확장해 나갈 예정이다.
이를 통해 헤리 브랜드를 앞세우는 치과 종합 플랫폼 업체로 도약하는 것이 유 대표의 꿈이다.
헤리바이오는 올해 연간 매출(거래중개액)로 2억원 정도를 예상한다.
유 대표는 뉴욕 전시회 등 올해 참가한 2차례의 해외 전시 행사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며 내년부터 매출이 급증할 것으로 낙관했다.
현재 12명의 팀원으로 구성된 헤리바이오는 지금까지 투자 전문 업체에 기대지 않고 운영자금을 융통했다.
국내외 기공소와 전 세계 치과의를 연결하는 플랫폼 업체로 성장 잠재력을 인정받아 플랫폼 사용자이기도 한 주변의 치과의사와 기공사들로부터 어렵지 않게 종잣돈을 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년부터 전문 투자업체를 대상으로 사업 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투자유치를 추진할 계획이다.
"우리 플랫폼이 정착하면 세계 기공물 시장에서 한국 역할이 굉장히 커질 겁니다. 아직은 미약하지만 한국 기공소들이 해외로 진출할 수 있는 창구가 되겠습니다."
parksj@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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