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칼럼] 늦게 찾아온 그리움

장석주 시인 2022. 12. 2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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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시인

자고 일어나니, 간밤에 폭설이 내렸는지 천지간이 하얗다. 키가 큰 전나무 가지마다 쌓인 눈이 소담하다. 전나무 너머 너른 회색빛 하늘 아래 먼 산도 순백이다. 고요가 켜켜이 쌓인 날에는 턴테이블에 즐겨듣는 음반을 찾아 올리자. 오늘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나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을 듣자. 음악이 주는 환희와 위안에 기대어 스스로에게 조금 더 관대해지자. 음악의 무아지경 속에서 마음의 격랑은 잦아들고 가슴은 기쁨으로 벅차오른다.

폭설이 내린 날에도 생명 가진 것들은 몸을 움직여 먹이를 찾느라 바쁘다. 먹고 사는 일은 사람이나 담비와 족제비들, 말과 황소들, 뭇 조류에게도 생명의 숭고한 업이다. 산수유나무 가지에 달린 빨간 열매를 쪼으러 곤줄박이 몇 마리가 날아든다. 곤줄박이가 산수유 열매를 쪼는 광경을 바라보다가, 문득 일하러 나간 어머니를 종일 기다리던 어린 날의 저녁들, 붉은 피에 잠긴 황혼이 사라지고 어둠 내린 마당을 가로질러 오신 어머니가 부엌에서 서둘러 쌀보다 보리가 많은 밥을 안치던 섣달그믐을 떠올린다. 마당엔 차가운 어둠이 차오르고 앙상한 나뭇가지에 걸린 하늘엔 별 한 점도 안 보였다. 저녁밥을 기다리다 지친 소년이 깜빡 잠이 들면 어머니는 기어코 흔들어 깨운다. 소년은 잠이 덜 깨어 비몽사몽 중이다. 그런 소년이 한밤중 밥상 앞에서 목구멍으로 넘기던 밥은 꺼끌꺼끌 했다.

가난은 조금도 자랑스럽지 않았다. 그 시절의 남루와 모욕을 견디고 살 만큼 용기를 준 것은 어머니다. 오, 열이 펄펄 끓던 소년의 이마에 차가운 손을 얹던 어머니, 나를 변함없이 사랑해주세요! 계절은 삐걱거리는 거룻배처럼 흘러가고, 당신 가슴 속 숨은 비탄과 환희는 감히 짐작조차 못하던 소년은 늙어 귀밑머리가 희끗희끗 해졌어요. 자식을 위해 늦은 저녁밥을 짓고, 구호물자로 받아온 우유를 데우던 어머니는 지금 이 세상에 안 계시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겐 날마다 뜨는 태양이다. 그 태양이 사라진 세상은 텅 비고 어둠은 고집 센 바위처럼 여린 마음을 짓누른다.

나는 행복했던가? 눈 덮인 겨울 마가목 열매는 붉고, 태양계에 속한 행성은 제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돈다. 그런 세상에 사는 동안 나는 아주 불행하지는 않았다. 내 안에서 죽음과 무가 자라난다. 나이 들어 허리가 굽을 때 우리 안의 짐승들은 살이 쪄서 뚱뚱해진다. 그런 불행쯤은 견딜 만했다. 봄엔 모란과 작약 꽃이 피고 여름밤엔 반딧불이가 꽁무니에 푸른 인광을 단 채 군무를 추었으니까. 무엇보다도 자기 몫의 감자도 심지 않고, 대리석으로 마을을 건설하는 업적을 남기지 않아도 우리 낡고 해진 옷을 꿰매고 떨어진 단추를 달아주던 어머니가 살아 계셨으니까.

오후에도 폭설에 덮인 세상은 여전히 고요하다. 돌이켜보면 좀 먹은 옷감 같이 헐벗은 내 영혼을 위로해준 건 어머니, 바다, 음악들이다. 어머니는 안 계시고, 바다는 저 멀리 있다. 그런 오후엔 잔치국수 한 그릇으로 출출한 배를 채우고, 행복에 겨워 가르릉거리는 고양이를 품에 안고 음악을 듣자. 오, 살아 있는 동안 당신의 어머니를 사랑하라. 어머니가 세상을 등진 뒤라면 편지 몇 줄이라도 쓰자. 그 편지를 부칠 데가 마땅치 않더라도 괜찮다. 어머니가 계신 천국의 주소를 아는 자식은 이 세상에 한 명도 없다. 우리 피난처이자 안식처인 어머니가 이 세상에 안 계신 걸 어떻게 받아들일까? 들짐승처럼 세상을 헤매던 자식을 안아줄 어머니가 안 계시다면 우리는 탄식을 하고 말겠지. 적막이 늙은 개처럼 짖는 밤에 우리는 흙이라도 한 줌 삼키는 심정으로 어머니를 그리워하겠지. 어머니, 무릎에 앉아 새처럼 종알거리던 소년은 늙었어요. 이게 믿어지시나요? 어머니도 믿지 못하실 거예요. 어머니, 어디에 계시든지 자식들의 때늦은 탄식과 그리움을 기억해주세요. 저희에게 부디 시련과 고난을 견딜 용기를 주시고, 죽음의 휘둘림에 의연하게 맞설 담대함을 갖게 해주세요. 어머니, 당신을 사랑합니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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