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50, 이제는 남은 삶의 목표를 찾고 싶습니다”[안주연의 다시, 연결]
2022. 12. 23. 06:01
‘자기만의 방’ 찾는 연습, 기적 질문으로 삶의 의미 되새기기
안녕하세요. 50을 앞둔 잡지 에디터 배혜정(가명)입니다. 여성이라 군대를 가지 않고 대학 졸업 후 바로 일했습니다. 20년도 훌쩍 넘게 달려왔는데 100세 시대를 맞아 이젠 65세에서 정년 연장 얘기도 나오네요. 감사하게도 현재 직장에서 잘릴 것을 우려하는 상황은 아닙니다. 하지만 성공이나 다른 목표도 없습니다. 언제까지 일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하는 일은 성취감도 있고 사회적인 영향력도 있어 많은 분들이 계속 일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게 저의 행복인지는 의구심이 듭니다. 50세가 넘어서도 대부분의 삶을 회사 일로 보내야 하는 걸까요. 물론 경제적 자유를 이룬 정도는 아니어서 월급이 들어오지 않으면 재정의 어려움도 있을 것이고 일하다가 집에만 있으면 무기력이 올까도 두렵습니다.
그런데 제2의 인생은 본인이 진짜 좋아하는 것을 찾으라는데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아, 청소년기에 원래 꿈꾸던 일이 현재의 일이긴 했습니다. 남은 삶의 목표, 이정표를 찾고 싶습니다.
혜정 님, 이렇게 만나게 돼 정말 반갑습니다. 혜정 님의 편지는 참 담담하고 솔직했어요. 이 편지를 읽으면서 저는 혜정 님에 관한 여러 가지를 마음속으로 그려볼 수 있었습니다. 제한적인 짧은 답변을 토대로 한 심리적 몽타주라 사실과 많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만 앞으로의 새로운 삶의 목표를 찾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 한 번 들어보시겠어요.
편지를 읽으며 처음 그려진 것은 참 오랜 기간, 꾸준히 그리고 유능하게 일해오신 관록 있는 에디터의 모습이었습니다. 눈에 띄는 표현은 ‘군대를 가지 않고 대학 졸업 후 바로 일했다’라는 것입니다. 대학을 마치자마자 그 흔한 방황이나 취업 준비 기간도 없이 지금 직업 분야에서 일을 시작하신 것 같습니다.
“25년 차입니다…”라는 대목의 어조에서 군대를 다녀왔거나 육아로 인해 휴직이나 경력 단절 기간이 있던 분들이라면 거의 정년 퇴임에 버금갈 만한 긴 기간 동안 쉬지 않고 일해 온 피로가 느껴졌다면 저의 오버일까요?
이렇게 꾸준히 일을 해오시면서 한편으로는 부인, 부모의 역할도 함께 해 오셨습니다. 현실적으로 여성이 꾸준히 일하면서 가정에서의 역할도 해내기 위해서는 혜정 님의 시간과 에너지를 최대한도로 사용하며 달리고 버텨야 하는 순간들도 정말 많았을 것 같습니다. 참 대단하고 수고하셨습니다.
또 한 가지, 제가 편지에서 느낀 혜정 님은 감정의 폭이 크지 않고 표현이 담백하며 엄살을 싫어하고 말보다 행동으로 실천하는 책임감 있는 분입니다. 살면서 본인의 사정을 이유로 양해를 구하거나 주변에 응석이나 어리광을 부릴 기회가 없었을 것 같고 성향 자체도 그런 태도를 좋아하지 않는 듯합니다. 그래서 에디터·부인·부모·사회인 등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이나 역할과 업무에 대해서는 피하거나 변명하기보다 최선을 다해 감당하고 완수해 왔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그러면서도 주변의 좀더 감정적이거나 의존적인 사람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너그럽고 관대하게 받아 줄 듯합니다. 가족이나 동료 사이에서 평판도 좋고 인기도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제가 너무 점쟁이 같았나요. 본인의 상황과 감정에 대해 명료하고 담백하게 서술한 글이 혜정 님의 이런 면모를 잘 보여주는 듯합니다.
이처럼 유능하고 성실하고 관대하며 일과 가정을 양립하는 직장인으로서 쉼 없이 달려온 25년. 이제 50을 앞둔 나이이지만 어쩌면 인생 경험이나 피로도로 볼 때는 60대의 은퇴를 앞둔 편집장이나 최고경영자(CEO)들과 더 비슷한 느낌과 감정을 느껴 그분들과 말이 잘 통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너무 많은 일을 압축적으로 잘해 와 그야말로 몸과 마음이 조금 낡고 지칠 때가 된 것은 아닐까요.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혜정 님 안의 어떤 부분이 다 닳아버린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현재까지 해온 일과 경력 등을 바탕으로 굉장히 피곤함을 느끼지만 무리해 빨리 다 타버린 번아웃과는 무언가 다른 느낌입니다. 오히려 질긴 청바지가 수십년 됐지만 여전히 낡은 채 기능하고 살아있는 느낌(worn out)에 더 가까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성공을 위한 열망이나 다른 목표도 없다고 느껴지는 지금의 상황과 함께 여전히 있는 자리와 회사에서 책임을 수행하면서 앞으로의 삶을 상상하는 질김의 힘이 매우 자연스럽다고 생각해 봅니다. 네, 그렇습니다. 이건 아마도 혜정 님의 장점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지내 왔기 때문에 회사나 업계는 여전히 혜정 님을 필요로 하고 주변 사람들은 남들은 명퇴하는 50에 성취감도 있고 사회적 영향력도 있는 일을 하며 회사에 남은 혜정 님을 부러워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팀원들에게 ‘나는 딱히 이 일에 목표도 없고 성공도 원하지 않는데 어쩌면 좋아’라고 상의하기도 어려울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데 담담한 혜정 님께서 아주 명확하게 본인의 마음을 표현한 대목이 있어요.
“(계속 일하는 것이) 저의 행복인지는 의구심이 듭니다. 50세가 넘어서도 대부분의 삶을 회사 일로 보내야 하는 걸까요.” 저도 명료하게 답해 드리고 싶습니다.
“아닙니다. 이제 혜정 님은 자기만의 방을 찾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이 지면을 통해 용기 내 사연을 보내 준 만큼 혜정 님의 마음은 간절하리라고 예상해 봅니다. 그리고 대개는 이런 용기를 낼 때만큼 적절한 시기는 또 없습니다.
혜정 님. 청소년기에 꿈꾸던 것이 지금의 직업이다 보니 제2의 인생을 위해 진짜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찾으려고 해도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하셨지요. 그런 혜정 님께 한 가지 질문을 해 봅니다. 시간을 들여 진지하게 답을 찾아보세요.
“당신은 지금 생계에 대한 압박감도, 가족이나 타인에 대한 부양의 책임도 없이 혼자 뉴질랜드에 와 있습니다. 여기 당신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당신에게는 최저 생활비와 1년이라는 시간이 있습니다. 자. 이제 당신은 무엇을 하며 지내고 싶은가요.” (혜정 님뿐만 아니라 다른 독자님들도 이것이 자신에게 던져진 질문이라고 생각하고 한 번 상상해 보세요. 1분간 상상한 후 다음 단락을 읽어 주세요.)
이 1분은 어떤 시간이었을까요. 눈을 감은 채 상상한 뉴질랜드에서 혜정 님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맛보고 누구의 손을 잡고 어디에 몸을 붙이고 손엔 무슨 책을 들고 있으며 어제는 무엇을 하셨던가요. 그리고 그로부터 느낀 자신의 감정들은 어떻게 밀려 들었을까요.
한마디로 바꿔 보면 혜정 님(그리고 독자님들)은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 발견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과 질문을 꼭 구체적으로 채워 주시기 바랍니다. 이 구체적인 모습들이 채워지고 그려지면 바로 그것이 혜정 님의 삶의 의미·이유·목적들이 될 것입니다. 잠시 설명하면, 이런 질문을 기적 질문이라고 부릅니다. 정말 기적같은 일이 벌어지고 나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한 가상 속에서 자신의 진실과 진심을 만날 수 있도록 돕는 도구입니다.
혹시 이 질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고 무엇을 읽고 마셨는지 채워지지 않는다고 해도 크게 걱정이나 놀라지 않기를 바랍니다. 전혀 괜찮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신호일 테니까요. 자기만의 방에서 적극적인 수동성을 누리다 보면 어느 순간 저 멀리서 파도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 밀려오는 파도 위에는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책, 사랑하는 관계, 소중함의 순간들이 얹혀 다가옵니다. 밀물을 당겨올 수도 없지만 당겨올 필요 또한 없습니다. ‘자기만의 방’에서 밀물에 얹혀 오는 것들을 그대로 느끼는 겁니다. 생각하거나 의지로 찾아내려고 하지 말고 기다림 속에서 발견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만의 방’은 공간인 동시에 (충분히 들어야만 하는) 시간일 것입니다.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혜정 님은 감정 표현이나 행동의 결은 차분하지만 자기만의 확고한 기준과 열정을 내면에 깊이 간직한 분이 아닐까 합니다. 외골수적인 성향도 있고 일할 때나 무언가에 골몰할 때는 주변이나 타인을 잘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직전 회사에서는 사내 문제점을 지적했다가 개혁 세력으로 낙인 찍히기도 했다고 하셨지요. 혜정 님이 지금까지 해 온 일은 자신의 욕구보다는 매체의 기조나 프로젝트를 위한 일들이 많을 것이고 목소리를 낸 것도 보다 옳고 바람직한 방향, 공익을 향한 일이 아니었을까요.
실행력이 있고 심지가 있는 혜정 님께, 이제는 타인을 위한 몰입과 주장보다는 자신을 위한 자기주장을 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자신은 무엇을 원하고 자신에게는 어떤 것이 더 필요한지 더 강하게 표현하고 실천해 보면 좋겠어요. 혜정 님께는 자신의 내면에 침잠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어떤 생각이나 작업을 발전시키고 곰삭이고 만들어 가는 일도 잘 어울리지 않을까 상상해 봤습니다.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했던 작가 버지니아 울프처럼요.
지금은 많이 지쳐 있지만 혜정 님은 변화를 위한 열정도 준비도 실행력도 갖춘 분입니다. 그래서 저는 앞의 기적 질문에서 떠올린 혜정 님만의 1년을 그저 상상이 아닌 실제 시간으로 가져 보라고 감히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곳이 어디라도 좋습니다. 타인이 아닌 자기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1년을 통해 그동안 책임과 역할에 눌려 있던 혜정 님만의 조용하고 뜨거운 열정이 다시 타오르기를 기대해 봅니다.
안주연 마인드맨션의원 대표원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한경비즈니스는 ‘안주연의 다시, 연결’을 연재하며 독자에게 상담 편지를 받고자 합니다. 마음 상담을 주제로 다양한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안주연 마인드맨션의원 대표원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이 직접 답하겠습니다. poof34@hankyung.com으로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안주연의 다시, 연결]
안녕하세요. 50을 앞둔 잡지 에디터 배혜정(가명)입니다. 여성이라 군대를 가지 않고 대학 졸업 후 바로 일했습니다. 20년도 훌쩍 넘게 달려왔는데 100세 시대를 맞아 이젠 65세에서 정년 연장 얘기도 나오네요. 감사하게도 현재 직장에서 잘릴 것을 우려하는 상황은 아닙니다. 하지만 성공이나 다른 목표도 없습니다. 언제까지 일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하는 일은 성취감도 있고 사회적인 영향력도 있어 많은 분들이 계속 일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게 저의 행복인지는 의구심이 듭니다. 50세가 넘어서도 대부분의 삶을 회사 일로 보내야 하는 걸까요. 물론 경제적 자유를 이룬 정도는 아니어서 월급이 들어오지 않으면 재정의 어려움도 있을 것이고 일하다가 집에만 있으면 무기력이 올까도 두렵습니다.
그런데 제2의 인생은 본인이 진짜 좋아하는 것을 찾으라는데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아, 청소년기에 원래 꿈꾸던 일이 현재의 일이긴 했습니다. 남은 삶의 목표, 이정표를 찾고 싶습니다.
혜정 님, 이렇게 만나게 돼 정말 반갑습니다. 혜정 님의 편지는 참 담담하고 솔직했어요. 이 편지를 읽으면서 저는 혜정 님에 관한 여러 가지를 마음속으로 그려볼 수 있었습니다. 제한적인 짧은 답변을 토대로 한 심리적 몽타주라 사실과 많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만 앞으로의 새로운 삶의 목표를 찾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 한 번 들어보시겠어요.
편지를 읽으며 처음 그려진 것은 참 오랜 기간, 꾸준히 그리고 유능하게 일해오신 관록 있는 에디터의 모습이었습니다. 눈에 띄는 표현은 ‘군대를 가지 않고 대학 졸업 후 바로 일했다’라는 것입니다. 대학을 마치자마자 그 흔한 방황이나 취업 준비 기간도 없이 지금 직업 분야에서 일을 시작하신 것 같습니다.
“25년 차입니다…”라는 대목의 어조에서 군대를 다녀왔거나 육아로 인해 휴직이나 경력 단절 기간이 있던 분들이라면 거의 정년 퇴임에 버금갈 만한 긴 기간 동안 쉬지 않고 일해 온 피로가 느껴졌다면 저의 오버일까요?
이렇게 꾸준히 일을 해오시면서 한편으로는 부인, 부모의 역할도 함께 해 오셨습니다. 현실적으로 여성이 꾸준히 일하면서 가정에서의 역할도 해내기 위해서는 혜정 님의 시간과 에너지를 최대한도로 사용하며 달리고 버텨야 하는 순간들도 정말 많았을 것 같습니다. 참 대단하고 수고하셨습니다.
또 한 가지, 제가 편지에서 느낀 혜정 님은 감정의 폭이 크지 않고 표현이 담백하며 엄살을 싫어하고 말보다 행동으로 실천하는 책임감 있는 분입니다. 살면서 본인의 사정을 이유로 양해를 구하거나 주변에 응석이나 어리광을 부릴 기회가 없었을 것 같고 성향 자체도 그런 태도를 좋아하지 않는 듯합니다. 그래서 에디터·부인·부모·사회인 등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이나 역할과 업무에 대해서는 피하거나 변명하기보다 최선을 다해 감당하고 완수해 왔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그러면서도 주변의 좀더 감정적이거나 의존적인 사람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너그럽고 관대하게 받아 줄 듯합니다. 가족이나 동료 사이에서 평판도 좋고 인기도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제가 너무 점쟁이 같았나요. 본인의 상황과 감정에 대해 명료하고 담백하게 서술한 글이 혜정 님의 이런 면모를 잘 보여주는 듯합니다.
이처럼 유능하고 성실하고 관대하며 일과 가정을 양립하는 직장인으로서 쉼 없이 달려온 25년. 이제 50을 앞둔 나이이지만 어쩌면 인생 경험이나 피로도로 볼 때는 60대의 은퇴를 앞둔 편집장이나 최고경영자(CEO)들과 더 비슷한 느낌과 감정을 느껴 그분들과 말이 잘 통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너무 많은 일을 압축적으로 잘해 와 그야말로 몸과 마음이 조금 낡고 지칠 때가 된 것은 아닐까요.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혜정 님 안의 어떤 부분이 다 닳아버린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현재까지 해온 일과 경력 등을 바탕으로 굉장히 피곤함을 느끼지만 무리해 빨리 다 타버린 번아웃과는 무언가 다른 느낌입니다. 오히려 질긴 청바지가 수십년 됐지만 여전히 낡은 채 기능하고 살아있는 느낌(worn out)에 더 가까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성공을 위한 열망이나 다른 목표도 없다고 느껴지는 지금의 상황과 함께 여전히 있는 자리와 회사에서 책임을 수행하면서 앞으로의 삶을 상상하는 질김의 힘이 매우 자연스럽다고 생각해 봅니다. 네, 그렇습니다. 이건 아마도 혜정 님의 장점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지내 왔기 때문에 회사나 업계는 여전히 혜정 님을 필요로 하고 주변 사람들은 남들은 명퇴하는 50에 성취감도 있고 사회적 영향력도 있는 일을 하며 회사에 남은 혜정 님을 부러워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팀원들에게 ‘나는 딱히 이 일에 목표도 없고 성공도 원하지 않는데 어쩌면 좋아’라고 상의하기도 어려울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데 담담한 혜정 님께서 아주 명확하게 본인의 마음을 표현한 대목이 있어요.
“(계속 일하는 것이) 저의 행복인지는 의구심이 듭니다. 50세가 넘어서도 대부분의 삶을 회사 일로 보내야 하는 걸까요.” 저도 명료하게 답해 드리고 싶습니다.
“아닙니다. 이제 혜정 님은 자기만의 방을 찾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이 지면을 통해 용기 내 사연을 보내 준 만큼 혜정 님의 마음은 간절하리라고 예상해 봅니다. 그리고 대개는 이런 용기를 낼 때만큼 적절한 시기는 또 없습니다.
혜정 님. 청소년기에 꿈꾸던 것이 지금의 직업이다 보니 제2의 인생을 위해 진짜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찾으려고 해도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하셨지요. 그런 혜정 님께 한 가지 질문을 해 봅니다. 시간을 들여 진지하게 답을 찾아보세요.
“당신은 지금 생계에 대한 압박감도, 가족이나 타인에 대한 부양의 책임도 없이 혼자 뉴질랜드에 와 있습니다. 여기 당신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당신에게는 최저 생활비와 1년이라는 시간이 있습니다. 자. 이제 당신은 무엇을 하며 지내고 싶은가요.” (혜정 님뿐만 아니라 다른 독자님들도 이것이 자신에게 던져진 질문이라고 생각하고 한 번 상상해 보세요. 1분간 상상한 후 다음 단락을 읽어 주세요.)
이 1분은 어떤 시간이었을까요. 눈을 감은 채 상상한 뉴질랜드에서 혜정 님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맛보고 누구의 손을 잡고 어디에 몸을 붙이고 손엔 무슨 책을 들고 있으며 어제는 무엇을 하셨던가요. 그리고 그로부터 느낀 자신의 감정들은 어떻게 밀려 들었을까요.
한마디로 바꿔 보면 혜정 님(그리고 독자님들)은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 발견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과 질문을 꼭 구체적으로 채워 주시기 바랍니다. 이 구체적인 모습들이 채워지고 그려지면 바로 그것이 혜정 님의 삶의 의미·이유·목적들이 될 것입니다. 잠시 설명하면, 이런 질문을 기적 질문이라고 부릅니다. 정말 기적같은 일이 벌어지고 나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한 가상 속에서 자신의 진실과 진심을 만날 수 있도록 돕는 도구입니다.
혹시 이 질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고 무엇을 읽고 마셨는지 채워지지 않는다고 해도 크게 걱정이나 놀라지 않기를 바랍니다. 전혀 괜찮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신호일 테니까요. 자기만의 방에서 적극적인 수동성을 누리다 보면 어느 순간 저 멀리서 파도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 밀려오는 파도 위에는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책, 사랑하는 관계, 소중함의 순간들이 얹혀 다가옵니다. 밀물을 당겨올 수도 없지만 당겨올 필요 또한 없습니다. ‘자기만의 방’에서 밀물에 얹혀 오는 것들을 그대로 느끼는 겁니다. 생각하거나 의지로 찾아내려고 하지 말고 기다림 속에서 발견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만의 방’은 공간인 동시에 (충분히 들어야만 하는) 시간일 것입니다.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혜정 님은 감정 표현이나 행동의 결은 차분하지만 자기만의 확고한 기준과 열정을 내면에 깊이 간직한 분이 아닐까 합니다. 외골수적인 성향도 있고 일할 때나 무언가에 골몰할 때는 주변이나 타인을 잘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직전 회사에서는 사내 문제점을 지적했다가 개혁 세력으로 낙인 찍히기도 했다고 하셨지요. 혜정 님이 지금까지 해 온 일은 자신의 욕구보다는 매체의 기조나 프로젝트를 위한 일들이 많을 것이고 목소리를 낸 것도 보다 옳고 바람직한 방향, 공익을 향한 일이 아니었을까요.
실행력이 있고 심지가 있는 혜정 님께, 이제는 타인을 위한 몰입과 주장보다는 자신을 위한 자기주장을 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자신은 무엇을 원하고 자신에게는 어떤 것이 더 필요한지 더 강하게 표현하고 실천해 보면 좋겠어요. 혜정 님께는 자신의 내면에 침잠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어떤 생각이나 작업을 발전시키고 곰삭이고 만들어 가는 일도 잘 어울리지 않을까 상상해 봤습니다.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했던 작가 버지니아 울프처럼요.
지금은 많이 지쳐 있지만 혜정 님은 변화를 위한 열정도 준비도 실행력도 갖춘 분입니다. 그래서 저는 앞의 기적 질문에서 떠올린 혜정 님만의 1년을 그저 상상이 아닌 실제 시간으로 가져 보라고 감히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곳이 어디라도 좋습니다. 타인이 아닌 자기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1년을 통해 그동안 책임과 역할에 눌려 있던 혜정 님만의 조용하고 뜨거운 열정이 다시 타오르기를 기대해 봅니다.
안주연 마인드맨션의원 대표원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한경비즈니스는 ‘안주연의 다시, 연결’을 연재하며 독자에게 상담 편지를 받고자 합니다. 마음 상담을 주제로 다양한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안주연 마인드맨션의원 대표원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이 직접 답하겠습니다. poof34@hankyung.com으로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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