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시인 김남주가 다시 물었다, 보리는 왜 밟혀 더 푸른가
시인·평론가 김형수의 복원
‘시적 증언’에 일상 취재 보태
“그의 시어는 농도가 다르다”
김남주 평전
김형수 지음 l 다산책방 l 2만2000원
시인으로서 전사이자 혁명가를 지향한 김남주(1945~1994)에게 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실생활에 무감했고 게을렀으며 부모의 경제력을 빌려 군역을 면탈하기도 했다. 그가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에서 감행한 작전은 무모해 보인다.
<김남주 평전>은 시인의 이러한 행적을 독자들이 ‘치부’로 볼 수 있는 데에 그닥 개의함이 없다. 기존 평전보다 자세한 편이다. 사건이 아닌 삶의 형상, 그리고 냄새들. 시인인 김형수의 경애 가득한 해석이 평전의 야무진 씨날줄이 되지만, 김남주의 삶 자체가 하나의 서정-서사시이므로 독자들의 독법은 조금 더 자유로워져도 좋겠다. 그의 존재를 기억하는 한.
김남주는 조국 해방 두달 뒤인 1945년 10월16일(1946년생 기록이 적지 않다) 태어나 1994년 새벽 암 투병 중 눈을 감았다. 반도의 끄트머리 해남에서 4·19혁명, 5·16군사정변에 들썩이며 중학교를 마쳤고, 유학 간 광주일고에서 한일외교 반대투쟁에 나섰다. 1969년 스물셋에 입학한 전남대(영문학)에서 3선개헌·교련 반대운동을 했다. 4학년 때 전국 최초로 유신반대 지하신문 <함성>(이후 <고발>)을 발행해 광주에 뿌렸다. 고문받고 옥살이를 한 배경이고, 이때 재판은 유신체제 최초의 법정 공방-다만 결론은 뻔한-현장이었다.
고통에 무릎 꿇는 자신에 놀라 “혐오”하고 “저주”하면서도, 존엄의 이름으로 “더이상 나의 육신을 학대 말라고/ 하찮은 것이지만/ 육신은 유일한 나의 확실성이라고”(‘진혼가’ 부분) 감각하고, “체포와 고문과 투옥의 공포야말로 가진 자들의 재산과 특권과 생명을 지켜주는 무기인 것”(<시와 혁명>)임을 인식하여 그는 다시금 맞서는 자가 된다.
대학 제적 뒤 낙향한 때가 1974년. 광주든 해남이든 그래 봐야 그는 매양 전라도 사람, 대학선배 박석무가 지어준 별명대로 서글서글 웃음 많은 ‘물봉’(물렁한 봉)이었다. 종이었던 아비 김봉수가 중농이 되어서도 그토록 반대했던 농군으로 되돌아와 발표한 시는 호남의 대지가 뻘겋게 물들인 결과라 해도 틀리지 않다. 동학농민전쟁의 본거지, “농민봉기가 진압된 후 한참 지난 1920년대에도 일본 여행사들은 전라남도의 내륙에 들어가지 말라고 경고”했던 데 아닌가. 그러고도 동학군의 최후항전지, 일제강점기 반전인사 오쿠보 쓰나지로처럼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일본인들이 몰려 산 데가 또 해남이질 않은가.
“그대는 겨울을/ 겨울답게 살아보았는가/…/ 보리는 왜 밟아줘야 더/ 팔팔하게 솟아나던가/ 잡초는 어떻게 뿌리를 박고/ 박토에서 군거하던가/…/ 곰팡이는 왜 암실에서 생명을 키우며/ 누룩처럼 몰래몰래 번식하던가/ 죽순은 땅속에서 무엇을 준비하던가/ 뱀과 함께 하늘을 찌르려고/ 죽창을 깎고 있던가”(‘잿더미’ 부분)
1974년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투고시들이 실리면서 제대로 시 한번 배워본 적 없던 그가 문단에 벽력처럼 이름을 알린다. 김수영과 김지하의 계보를 예비하되 차이는 엄연하여 당시 창비 편집주간 염무웅 평론가는 이후 “앞세대 시인들의 선행 업적을 충분히 숙독한 흔적 즉 날카로운 현대성을 지니고 있었으나, 그의 사람됨은 도무지 때가 벗지 않은 투박함 그것이었다”고 평가한다.
그즈음 도시에선 민청학련 사건으로 서울은 물론이요, 자신의 반토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이강을 포함한 광주의 어지간한 민주인사들이 모조리 붙잡혀간다.
시인이 되었으나 시인으로 살 수 없는 부조리의 시대. 평전으로만 보자면, 김남주의 적나라한 인식에서 버릇처럼 터져 나오는 말과 시어는 “자유”와 “존엄”, 그리고 “좆되어부렀다”일 것이다.
존엄은 김지하의 생명론과 다르지 않고, 자유는 도시인 김수영의 것과 다르지 않을지언정 “좆되어부렀다”는 김남주식 핍진한 현실 인식이자, 절망으로부터 짐짓 희망까지 배태하는 민초 민중의 가장 능청스런 가락을 재현한다.
저 셋의 인식은 다음 시 35자로 서슬 퍼래 여태 바랠 수 없다.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고/ 주인이 종을 깔보자/ 종이 주인의 목을 베어버리더라/ 바로 그 낫으로”(‘종과 주인’)
더는 내지를 수도, 에두를 수도 없는 벼랑 끝 시상으로, 사태로만 보자면 종은 “좆되어부렀”으나, 저 지점에서 종의 존엄이 변증되고 종의 자유는 구현된다.
김남주는 주변의 민주투사들조차 거리를 뒀던 비밀조직에 1978년 가담한다. 남민전, 한국 근현대사에서 자행된 가장 참혹한 사법살인인 ‘인혁당 사건’(1974) 이후 남은 인혁당 관련자들도 포함되어 있던 투쟁조직. 이 경로를 저자는 김남주가 혁명가로서 택한 전사의 길이라 이르며 “전사가 주목하는 일은 낡은 세계를 깨부수는 것, 즉 현실 세계의 장애물을 해치우는 일”로 “건설에 간섭하지 않는다. 자신은 그들에게 ‘잿더미’를 안겨줄 계획이기 때문”이라고 적는다.
1978년말 상공부 고위 부패관료의 집을 턴 ‘봉화산 작전’, 이듬해 재벌2세 무리로 ‘장안 7공자’로 불렸던 건설사 회장을 타격하려던 ‘전위대 1호 땅벌작전’ 뒤 또 붙잡혀 고문받은 김남주는 그해 말 옥중에서 ‘유신 대통령’의 종말, 그리고 아버지의 부고를 접한다.
15년형을 받아 9년3개월 만인 1988년 12월21일 석방되기까지 영어의 전사에겐 끝내 생존하고 끝끝내 써내는 일만이 “낫”을 놓지 않는 일이리라. 옥중에 겪지 않아 더 처절했던 5·18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학살1’)로 증언하고, “어머니 이 밥을 받아야 합니까/…/ 가마니떼기 위에 놓은 컴컴한 이 주먹밥을/ 수갑 찬 두 손으로 먹어야 합니까/…/ 차라리 죽어버리라고 어머니 왜 말씀 못하세요”(‘편지2’)라며 추궁하여 거듭 존엄과 자유를 새긴다.
그가 옥중연서를 보낼 여인이 있었다는 사실, 또 다른 미지의 연서가 답지한 사실, 석방 후 추진된 ‘김남주 문학기행’에 김남조 시인으로 혼동한 이들도 동행한 사실 등 평전에서 웃음을 나누는 대목이 없지 않지만, 무엇도 김남주 자신의 벌씬벌씬 웃음보다 크긴 어렵다.
기억되는 70, 80년대 어떤 전사도, 열사도 홀로인 적이 없다. 평전에도 실로 많은 인사들이 김남주의 세계로 들어오고, 그들의 세계로 김남주를 들인다. 떠난 자와 남은 자가 있고, 그 둘 사이에서 기대어 숨 쉬는 이후의 사람들이 있다. 그 강력한 현재성으로 이미 앞서 ‘김남주 평전’이 나오지 않았을 리 없다. 강대석과 김삼웅의 것이 대표적이다. 시인 김형수는 “김남주의 삶의 모습은 적다고 생각했다”며 “대중이 사건의 시간적 연결로 그를 이해하고, 그렇게 묻혀선 안 되었다”고 22일 <한겨레>에 말했다. 방향이 무엇이든 시 없이 가능한 김남주 평전은 없다. 평론가이기도 한 저자가 보기에 “그의 시는 너무 가파르고 격렬하게 퍼지고 지나가, 문학사적으로 되레 덜 이해받고 있다.” 더더욱 ‘시적 증언’으로 김남주를 복원하려던 까닭. ‘종과 주인’ 저 낫이 평전의 시작이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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