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미술 어머니? ‘보헤미안’ 케테 콜비츠도 있다 [책&생각]
‘민중미술의 어머니’ 선입견 넘어
여성 예술가의 흔들리는 삶과 예술
인간적이어서 더욱 경이로운…
케테 콜비츠 평전
유리·소냐 빈터베르크 지음, 조이한·김정근 옮김
풍월당 l 4만3000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독일의 희곡 작가 게르하르트 하웁트만은 1927년 독일의 화가·판화가·조각가 케테 콜비츠(1867~1945)의 60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연설에서 이런 말을 했다. “그녀의 예술은 삶의 다채로운 모습을 알지 못한다. 그녀의 예술은 태양과 하늘, 태양과 바다, 태양과 대지가 우쭐대면서 서로에게 내보이는 색채의 유희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케테 콜비츠의 예술은 거의 이 모든 것에 저항한다고, 아니 마치 고발이라도 하려는 것 같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가난과 전쟁의 피해자들이 겪는 고통을 흑백판화에 담아냈던 콜비츠의 작품들을 보다 보면, 수많은 자화상 속에서 늘 서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 작가마저도 그렇게 존재했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하웁트만이 저 뒤에 이 말을 덧붙였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는 것은 단지 그녀의 예술이지, 단연코 예술가 자신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콜비츠를 ‘민중미술의 어머니’로 추앙하지만, 그의 삶이 얼마나 풍부했는지는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콜비츠는 일기, 회고록 등 많은 자전적 기록을 남겼고, 이를 생전에 스스로 정리(1923년 <회고록>, 1941년 <유년시절에 대한 회상>)까지 했는데도 그렇다. 작품 세계에 대한 해설서는 많지만 그의 삶을 들여다본 저술은 미술사가 카테리나 크라머가 집필한 평전(1981년) 정도에 그친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압도적인 작품 세계에서 뻗어나와 공산주의자, 페미니스트, 평화주의자 등의 형태로 작가에게 덧씌워진 선입견이 워낙 강고한 탓이 크리라.
2015년 원저가 출간된 <케테 콜비츠 평전>은 콜비츠의 작품들보다 콜비츠라는 인간 자체를 탐구한 책이다. 언론인·작가인 유리·소냐 빈터베르크 부부는 콜비츠와 관련된 기록들을 샅샅이 뒤져 그의 삶 전체를 복구해냈다. 조사 과정에서 여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자화상도 찾아냈는데, 콜비츠가 1889년께 그린 이 그림이 보기 드문 채색 작품, 더군다나 수채로 그린 작품이었다는 것이 놀랍다고 지은이들은 말한다. 지은이들이 찾아낸 콜비츠의 풍부한 모습에는 “열정적이고 기분 좋으며, 언젠가 그녀 자신이 이야기한 것처럼 “항상 누군가에 푹 빠졌고”, 남자와 여자 모두를 심지어 밤중의 꿈에서는 자신의 아들조차 갈망한다는 것을 거리낌 없이 고백했던 또다른 콜비츠도 있었다.”
콜비츠는 프로이센 제국 치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자유 공동체’ 등 사회 참여에 적극적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사회민주주의자들 편에 선 아버지, 오빠 그리고 미래의 남편이 그에게는 사회주의 이념을 다루도록 만든 강력한 자극이” 됐다. 물론 어렸을 때부터 그는 이미 “미학적 이유”로 노동자 계급에 끌렸는데, 회고록에서 그는 “아버지의 책장에서 발견한 윌리엄 호가스의 동판화 화집과 ‘부두 노동자들’이 있는 도시 자체”를 자신의 직접적 성장에 중요한 두 가지 자극으로 꼽았다. 예술가로서의 야심이 있던 그녀는 여학생을 위한 뮌헨의 미술학교에 다니며 친구들을 사귀었고, 축제와 무도회에 열정적으로 참여해 춤을 추는 등 자유분방한 ‘보헤미안의 삶’을 살기도 했다.
1893년 베를린에서 하웁트만의 연극 작품 ‘직조공’이 “계급에 대한 증오”를 부추긴다는 이유로 상연 금지되는 일이 벌어졌는데, ‘직조공’은 콜비츠가 <직조공 봉기> 연작을 만들게 하는 등 그의 “작업에서 하나의 이정표”가 됐다. 이전까지 그는 ‘추한 것에서 진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는 미학적 이유에서 프롤레타리아적 삶에 매혹됐으나, ‘직조공’에서 받은 충격을 계기로 “겉모습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의 내면 삶에서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을 식별할 수 있게 되었다.” 주목받는 예술가가 된 콜비츠는 ‘봉기’(1899), ‘카르마뇰’(1901), <농민전쟁> 연작 등을 만든다. 무엇보다 지은이들은 콜비츠가 “삶을 변형시키는 것이 예술의 임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 그 작업이 “추상적인 시간 개념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현실에서 발전해 나온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단지 “고통에 대해 알고, 그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것’”으로써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동정을 진정한 예술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자신이 만난 노동자들의 고된 삶을 증언하는 구체적인 사실들을 적어놓은 기록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어린 나이에 남동생을 떠나보냈던 콜비츠는 1차 대전에서 자원입대한 둘째 아들을 잃었다. 남편의 죽음 뒤 2차 대전에서는 손자를 잃었다. 거대한 상실과 슬픔에 뿌리를 둔 그의 삶과 작품 세계는 정치적 논쟁과 예술적 야망과 밀접하게 얽혀 소용돌이쳤다. 그는 오랫동안 “아들 페터가 희생적인 죽음을 맞았고, 그의 죽음은 의미가 있었다는 생각에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그는 “더 이상 단 하루도 전쟁은 안 된다” 확신했고, 이를 위한 정치적 호소에도 나섰다. 1910~20년대엔 “벽보의 형태로든 혹은 책 표지의 주제로든 자신의 미술을 사회를 고발하기 위해 이용”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콜비츠에게는 보편적 경험으로서의 슬픔과 고통이 정치적 호소보다 더 중요했으며, 그의 삶과 예술은 끊임없이 흔들려야 했다. 지은이들은 “콜비츠가 정해진 모든 분류를 벗어나기 때문에, 애초에 그녀에게 그런 분류용 서랍을 만들어 구분했던 사람들은 실망을 피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이를테면 콜비츠는 젊은 여성의 개인적인 삶의 투쟁에 늘 큰 관심을 가졌으나, 생전 그 어떤 여성 조직에도 가입하기를 거부하는 등 ‘여성운동가’의 전형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시 전쟁은 안 돼!’ 같은 벽보는 그를 한치의 주저 없는 ‘평화주의자’로 여기게 하지만, 그는 인생 중반부와 말년에 가서야 비로소 평화주의자가 되었다. 책은 오랜 우상화로 딱딱해진 껍데기를 걷어내어, 지극히 인간적이어서 더욱 경이로운 한 여성 예술가의 진면목을 만나게 해준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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