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엔 달라진 ‘그 다음’이 필요하다 [책&생각]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배시은 시인의 첫 시집 <소공포> 는 "우리는 곧바로/ 그다음 상황에 놓인다"라는 '자서'(自序)로 시작한다. 소공포>
그러나 반복해서 들여다보면 이는 쉽게 소멸되고 마는 현재 그 자체를 망각하기란 얼마나 쉬운지 서늘하게 묻는 문장으로 읽힌다.
새로운 말이 태어나지 못하는 환경, 주어진 자원을 반복해서 사용할 수밖에 없는 조건에서 어떻게든 '그다음 상황'으로 가고자 하는 시인의 몸짓이 자꾸 외롭게 느껴지는 것이다.
2023년엔 달라진 '그다음'이 필요하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소공포
배시은 지음 l 민음사(2022)
배시은 시인의 첫 시집 <소공포>는 “우리는 곧바로/ 그다음 상황에 놓인다”라는 ‘자서’(自序)로 시작한다. 이 문장은 기이하다. 가령 이를 우리가 딛고 선 현재란 언제나 미래를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임을 일러주는 문장으로 본다면, 이는 지금이 얼마나 엉망이든지 간에 ‘희망’이나 ‘전망’을 쉽게 포기할 수 없다는 메시지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복해서 들여다보면 이는 쉽게 소멸되고 마는 현재 그 자체를 망각하기란 얼마나 쉬운지 서늘하게 묻는 문장으로 읽힌다. 우리가 현재로부터 자연스레 등을 돌린 이들임을 ‘곧바로’라는 부사가 이미 알아챈 셈이다. 충실할 현재가 온데간데없는 삶이란 곧 더 나아질 다음도 없는 삶을 이른다. 시인은 지금 세계가 사람들로 하여금 당장의 한 순간에만 몰두하게 만듦으로써 지금 이후에 대한 상상을 어떻게 가로막고 있는지, 모든 대안이 가로막힌 자리는 지금 이곳을 얼마나 협소한 풍경으로 형성해버리는지에 이목을 집중시킨다.
시집에 수록된 여러 시편들에서 자주 활용되는 ‘같은 말의 반복’에서 쓸쓸함이 비어져 나오는 까닭도 여기에 있는 듯싶다. 새로운 말이 태어나지 못하는 환경, 주어진 자원을 반복해서 사용할 수밖에 없는 조건에서 어떻게든 ‘그다음 상황’으로 가고자 하는 시인의 몸짓이 자꾸 외롭게 느껴지는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는 “빙 돌아”(‘해체전’) 겨우 지금에만 머물게 하고, 다른 세상으로 갈 수 없다고 억압함으로써 지금 우리가 충실해야 할 현재를 오히려 납작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시인은 초라한 현재로 이루어진 사회를 거침없이 폭로한다.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아./ 그들 중 하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입 밖으로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는다. 그들은 나란히 몸을 누인다. 그러고 나자 오히려 편안하다.// 그들 중 하나의 생각밖에 알 수 없는 것은 그들이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다.// 더 좋은 건 없어./ 그들 중 하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 옆에 있다. 그런 다음 꽤 편안하다.//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그들은 입을 딱 벌리고 입을 다물었다./ 그들 중 하나가 생각의 유일한 이유다.// 나아진 게 없어./ 여러분이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들이 똑같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들 중 하나는 마음속으로 너무 많이 생각하고 입 밖으로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는다.// 그들 중 하나의 생각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똑같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들 중 하나는 왜 그들이 똑같이 생겼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은 유일하다.”(‘소공포’ 전문)
시에 등장하는 “그들”은 “나아지지 않아”, “더 좋은 건 없어”와 같은 생각을 한다. 그러곤 지금 주어진 생활이 “편안”하다 여기고, “입을 다”문다. 지금 이 자리에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가 왜 더 나아질 수 없는지, 왜 더 좋은 걸 찾아선 안 되는지, 왜 이보다 더 좋은 삶을 찾아 나설 수 없는지에 대한 질문이 금지된 사회에 아무래도 우리는 갇힌 것 같다. 그래서일까. 시는 경고한다. 그러는 사이 “하나의 생각”에 파묻힌 이들은 모두 “똑같”아 지고 각자의 “유일한” 얼굴을, ‘유일한 삶’을 잃는다고.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를 더 이상 초라하게 방치해선 안 된다. 2023년엔 달라진 ‘그다음’이 필요하다.
양경언/문학평론가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법원에만 사과한다, 성폭력 사망 유족한텐 안 한다”
- 산타도 롱패딩은 필수…꽁꽁 언 전국 “한파 크리스마스!”
- 서울 지하철 3호선 운행 재개…화재로 1시간 넘게 중단
- 핏줄까지 투명하게…유리개구리 완벽한 은신술, 간 때문이다
- 발끈한 김여정 “두고 봐라”…북 ‘ICBM 재진입 기술’ 어디까지?
- 제주 산간 77㎝ 쌓인 눈…폭설·강풍에 하늘·바닷길 모두 끊겨
- 하루에 1분씩 3번만 뛰세요, 암 사망률 38% 줄여줍니다
- 지지율 업고 활동 늘리는 김건희 여사…‘사후 브리핑’은 여전
- [단독] 뒤차 놀래키는 전기차 ‘브레이크등’…국토부 이제야 바꾼다
- 경찰·소방·교통공사 ‘엇박자’…재난대응 시스템은 껍데기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