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통해 오고가는 단정한 ‘순정’, 순정책방 [책&생각]

한겨레 2022. 12. 23.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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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색 벽돌을 켜켜이 쌓아올린 담장 안으로 올망졸망 정성어린 화분들이 줄지어 놓여 있는 주택가.

그 사이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봐야 보이는 노란색 간판 위로 '순정책방' 단정한 네 글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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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책방은요]우리 책방은요 | 순정책방
순정책방 바깥 모습.

붉은색 벽돌을 켜켜이 쌓아올린 담장 안으로 올망졸망 정성어린 화분들이 줄지어 놓여 있는 주택가. 그 사이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봐야 보이는 노란색 간판 위로 ‘순정책방’ 단정한 네 글자가 있다. 오랫동안 방송 일만 해오다 문득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무심하게 던진 시선 끝에 잠시나마 내 삶을 환기시켜준 여행지에서의 추억들로 가득한 박스가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빛을 잃어가는 게 보였다. 그 순간 ‘내가 만나러 나설 용기가 없다면, 내가 있는 곳으로 초대를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2017년 한글날, 서울 동쪽 끝자락에 순정책방은 그렇게 문을 열었다.

도시 농부로 지낸 지 10년, 흙을 고르고 씨앗을 뿌려 식탁에 올리는 자급자족의 단출한 삶 때문인지, 책방 서가도 자연·동물·여성 등 이와 어울리게 채워졌다. 처음부터 ‘제로웨이스트 책방’을 목표로 해, 손님들도 일회용품을 사용하지 않는 노력에 동참해주고 있다. 전 세계 농부들의 인터뷰를 담은 다큐멘터리(<자연농>)를 바탕으로 만든 책 <불안과 경쟁 없는 이곳에서>(열매하나)의 작가님을 모시고 첫 북토크를 한 날이 떠오른다. 추운 계절, 책방의 첫 단골손님은 비건유부초밥과 된장국을 준비해 오고, 나는 고구마를 굽고, 작가님은 책 사이에 곱게 말려둔 꽃잎과 풀잎을 한 장 한 장 종이에 붙여 엽서를 만들어 선물로 나누어주었다. 고속버스를 타고 오는 긴 여정에도 피곤한 기색 없이 따뜻한 마음들이 모아져 빛났던 하루.

순정책방에서 펼치는 ‘위로의 그림책’ 프로그램 모습.
순정책방 내부 모습.
현장 과학자와 함께한 암사 생태숲 탐방 프로그램 모습.
대나무바구니 만들기 수업을 했던 날 모습.
순정책방의 노란 간판.

지난 5년간 책방의 다양한 프로그램들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럼 해볼까?’라는 가벼운 마음에서 출발했다. 엄마와 함께 가꾼 ‘소녀농장’에 소담스러운 캐모마일이 장관을 이루어 사람들에게 보여주니, 직접 꽃을 따보고 싶다 하여 ‘팜파티’를 열었다. 캐모마일과 푸성귀를 따고, 준비해온 도시락을 먹고 근처 생태 숲을 걸었다. 동네 구멍가게 앞 툇마루에 걸터앉아 아이스크림 하나씩 입에 물고, 시원스럽게 뻗은 가래나무를 바라보며 인생의 고민도 나누었다. 10년 동안 3교대로 환자를 돌보던 간호사의 “내 나이의 다른 사람들은 뭐 하며 살까요?” 하는 말에, ‘뭐 하고 사세요’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엔지오(NGO)에서 활동하는 게스트는 ‘중남미에서 밥해 먹고 재미있게 놀며 살아요’ 화답했다. 뾰족산 위를 걷듯 사회적 약자로 힘겨워했던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위로하는 날도 있었다.

책과 식물 사이 빛이 스며드는 오후, 이 공간에 들어선 누구라도 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눈물을 흘린다. 적당한 거리가 존중되는 익명의 공간에서 마음 깊이 숨겨두었던 이야기를 책방 주인에게만 털어놓는다. 5년이라는 시간 속에 무럭무럭 새순을 피워 올린 식물처럼 책방을 찾는 분들과 나 역시 일상에서 조금은 성장하고, 숨을 고루 내쉴 수 있었던 건 아닌지, 책을 나누는 사이 우리 삶에 안정감이 그제야 자리를 찾아가는 건 아닌지, 늘 곁에 있어준 고마운 책들을 바라보며 긴 호흡으로 책 향기를 가득 담아본다.

글·사진 김예 순정책방 책방지기

순정책방
서울시 강동구 명일동 191 1층
https://blog.naver.com/soonjung_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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