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해요, 지금의 성평등 교육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2022 개정 교육과정 22일 확정
학교 현장서 관련 교육 위축 우려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황인찬 시인의 작품 ‘무화과 숲’의 마지막 구절이다. 수도권의 한 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교사 ㄱ씨는 수업시간에 성평등과 퀴어(기존 이분법적 성별로 분류할 수 없는 성별 정체성) 교육을 하며 이 시를 학생들과 함께 읽었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이 시는 자신의 존재를 숨겨야 하는 성소수자의 현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ㄱ씨는 시뿐만이 아니라, 가요와 문학작품 등 다양한 수업자료를 활용한다. 학생들과 미국 팝가수 레이디 가가의 대표곡 ‘본 디스 웨이’를 함께 듣고, 연암 박지원의 고전소설 ‘허생전’을 패러디해 허생의 아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현대소설 <허생의 처>를 함께 읽는다. ‘본 디스 웨이’ 노랫말에는 엘지비티(LGBT: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가 등장한다. 이남희 작가가 쓴 <허생의 처>는 남성 중심의 가부장 사회를 보여준다.
지난 3년 동안 관련 교육을 이어왔지만, ㄱ씨는 늘 마음 한편이 불안하다고 했다. “운 좋게도 지금까지 학교에 민원이 들어온 적은 없지만, 같은 동네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는 내용의 현수막이 걸려 있거든요. 언제까지 이런 교육을 할 수 있을지, 늘 걱정되죠.” 최근 국가교육위원회가 ‘2022 개정 교육과정’을 심의·의결한 뒤로 이런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고 한다.
교육부가 ‘성평등’ ‘성소수자’ ‘재생산권’뿐만 아니라 이들 용어의 근간이 되는 ‘섹슈얼리티’까지 삭제된 새 교육과정을 22일 발표한 가운데, 시민사회 진영은 물론 학교 현장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성평등 교육이 위축되고, 학생들이 원하는 교육을 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경남 지역에서 10년 넘게 보건 과목을 가르치고 있는 교사 ㄴ씨는 이날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학생들이 동성애는 무엇인지, 우리 사회에서 동성애를 인정해야 하는지, 어떤 관계의 연애가 좋은 것인지를 많이 묻는다”며 “누구나 폭력과 강제, 억압, 차별 없이 안전하고 평등한 관계에서 본인의 의사에 따라 성적인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려면 섹슈얼리티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ㄴ씨는 섹슈얼리티 수업을 할 때 유네스코의 국제 성교육 가이드와 그밖의 다른 기관에서 만든 성교육 자료를 활용한다. 이를 통해 상대에게 성적 이끌림을 느끼고 그와 깊은 관계를 맺고 싶은 성적 지향이 이성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 양성애, 범성애 등 스펙트럼이 다양하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또한 임신과 출산, 피임, 임신중지를 둘러싼 개인의 권리는 무엇이고, 이런 재생산 권리를 국가와 사회가 어떻게 보장해야 하는지도 교육하고 있다.
교사들은 이런 교육 효과가 학교 현장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ㄴ씨는 “‘동성애가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학생도 있지만, 성소수자 차별은 잘못됐고 다른 모든 사람처럼 동등하게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더 많다”고 말했다. ㄱ씨도 “수업 때 단백질 음료 광고를 학생들과 함께 보고, 같은 광고를 하면서도 남성 모델은 힘을 강조하는 반면 여성 모델은 몸매를 강조하는지를 두고 이야기를 나눈 적 있다”며 “이를 통해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에게 권장하고 기대하는 역할이 다르다는 점과 이것이 성 역할 고정관념이라는 점을 학생들이 이해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교육과정에서 ‘성소수자’ ‘섹슈얼리티’ 같은 말이 빠지면, 앞으로 관련 수업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ㄱ씨는 “교육과정이란 것은 교사가 수업할 때 지켜야 하고 학습 내용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법적 문서와 다름없다”며 “(혐오) 공격을 받더라도 교육과정 총론에 ‘성평등’이 적혀 있으면 ‘교육과정에 분명히 명시돼 있다’고 방어를 할 수 있지만, 지금처럼 관련 용어들이 삭제되면 교사가 소신대로 교육하기 어려워진다. 맞설 방패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손지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부위원장은 “존재를 정상과 비정상, 우월과 열등 같은 위계로 나누지 않고 모두가 평등하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 시민교육”이라며 “다양한 유형의 성폭력과 성소수자 혐오를 예방하는 차원에서도 필요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포용성을 갖춘 민주시민을 키우기 위해 섹슈얼리티, 성평등, 성소수자 교육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오세진 기자 5sj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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