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월드컵의 공
자갈밭의 땡볕처럼 후끈 달아오른 관중들 앞에서 거의 팬티 바람의 다 큰 어른들이 편을 나누어 싸우고 있다. 이곳을 지배하는 주인공은 단연 공이다. 땀에 젖은 머리통만 한 공. 통통통 경박하게 튀기 좋아하는 이 녀석이 선수나 감독의 운명, 관중과 시청자들의 기분을 들었다 놓을 줄을 뉘 알았으랴. 세상의 모든 눈들이 오로지 이 천방지축의 공을 쫄쫄쫄 쫓아다닌다. 축구의 공격과 수비는 그 기본원리가 공을 가지겠다는 게 아니다. 끝내 상대가 꼼짝없이 공을 가지도록 하는 데 있다. 우리 영역에는 잠깐의 체류도 허용치 않겠다는 결기가 대단하다.
아, 악착같은 공, 이쪽으로 온다. 빚쟁이처럼 쫓아오는 공, 아교처럼 착 들러붙겠다는 공. 입술의 거짓말처럼 자꾸 어른거리는 공. 그럴수록 던지고, 차고, 때리고, 쫓아낸다. 기를 쓰고 서로 상대방에게 주겠다고 작전까지 쓰며 안달이다. 단 하나의 길을 찾아서 어떻게든 저쪽으로 떠넘기려 한다. 그렇게 사랑하는 공을 최선을 다해 내 것이 아닌 것으로 만들겠다는 엄청난 힘과 정교한 기술. 무소유라는 글자 그대로의 뜻을 제대로 실천하겠다며 투지에 넘친다.
공이라고 제 마음대로 하는 건 아니었다. 한소식 들은 듯 마음을 텅 비운 덕분에 운동장을 자유자재하게 돌아다니지만 금도가 있다. 선 바깥으로 나간 순간 아웃이다. 인정사정없는 시간이 또한 문제였다. 전·후반 90분과추가 시간이 지나면 공은 소용을 잃는다. 공이 운동장을 벗어나면 아웃이듯, 시간에서 이탈한 순간 공은 끝장이다.
모두들 초조하게 시계를 본다. 초침은 세 종류다. 마라톤 선수처럼 죽죽죽 뛰어가거나 이웃집 아저씨처럼 터벅터벅 걸어가거나 아예 없거나. 뚜껑 속을 한 바퀴 도는 것인데도 어쩐지 그냥 죽 가는 시계 앞에선 여유가 없어지고 덩달아 마음이 바빠진다. 지고 있는 팀의 감독이라도 된 기분이다. 이윽고 휘슬이 울렸다. 그동안 세상의 시선을 받아내느라 불편했던 공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한구석에 무덤처럼 앉아 울고 웃는 관중석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공. 아, 공이란 무엇인가.
월드컵이 끝났다. 이번에도 어김이 없었다. 골을 많이 먹은 팀 그러니까 공을 많이 가진 쪽이 결국, 졌다.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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