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국의 우리문화 들배지기] 한반도라는 예술 ‘용광로’
최근 전남도교육청의 요청으로 ‘서(書)와 현대미술’에 대해 특강을 할 기회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필자는 ‘광주비엔날레와 베니스비엔날레가 뭐가 다른가’를 교육행정 전문가들에게 질문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다시 ‘전남수묵비엔날레는 왜 있어야 되는가’를 물었다. 역시 묵묵부답이었다. 그래서 ‘수묵비엔날레가 광주에 통합되어야 한다’고 자문자답을 했다. 갈수록 가관인 필자의 꿈속을 헤매는 질문에 모두들 뜬금없다는 표정이었다.
물론 여기서 한 필자의 질문 본뜻은 ‘광주’와 ‘수묵’에 있지 않다. 서(書)와 미술의 결별이 장르 간 배타성으로 인해 불치에 가까운 고질병이 되었다는 데 있다. 모든 예술세계가 융·복합이라는 광풍에 휩싸인 지도 오래다. 하지만 서와 현대미술의 불상유통은 요지부동이다. 서와 미술의 100년 결별을 종식시키고 민주화 완성지로서 광주의 정체성을 세계에 자리매김하는 일은 전라도가 예향의 본자리임을 재현하는 데에 있다.
‘화=미술’이 아니라 ‘서화=미술’이 그것이다. 운림산방 4대가, 추사 김정희, 초의 의순, 창암 이삼만, 다산 정약용, 원교 이광사, 공재 윤두서, 고산 윤선도와 같은 조선의 역사 속 기라성 같은 인물들의 필묵이 시서화로 켜켜이 탑을 쌓고 있는 곳이 전라도다. 이것이 광주라는 비엔날레 용광로에서 현대미술과 융·복합되어 유감없이 녹아져 나올 때 광주는 베니스와 같고도 다른 세계의 예향으로 도약한다.
서(書)로 보는 한반도는 전통과 현대, 대륙과 해양, 동양과 서양 문명이 충돌·화해하는 인류의 예술 용광로다. 일차적으로 문자의 모태인 문양·한자(漢字)·한글이 얽히고설키어 있다. 천전리 추상암각문양과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와 김생체(金生體), 그리고 훈민정음이 그것이다. 특히 천전리는 반구대 고래·호랑이·사슴과 함께 이미 1만년 전에 추상이 각획(刻劃)되고 있다. 정음(正音)에서 말한 ‘천지자연의 소리가 있으면 반드시 천지자연의 문양·문자가 있다’는 세종의 소리세계 통찰의 실현 현장이 된다. 도구를 잣대로 보아도 칼 새김, 붓글씨 쓰기, 활자(活字) 찍기가 시루떡처럼 쌓여 있다. 선사 암각화와 무구정광대탑다라니경, 직지(直指)와 같은 인류 차원의 기록유산이 그것이다. 오늘날 기계시대 키보드 ‘치기’의 전조가 여기이고 보면 ‘치기’ 사람들의 인간성 상실문제 해결책도 이곳 붓글씨 ‘쓰기’가 약이다.
사상적으로도 최치원의 풍류(風流)가 증명하듯 하늘·땅·사람의 천지인 삼재(三才)를 기둥으로 무(巫)와 유불도가 이 땅에서 회통되고 있다. 지눌이나 서산, 사명과 같이 만사를 공(空)으로 간주한 선장(禪匠)들이 ‘마음 비움’을 화두로 ‘네가 부처임(心是佛)’을 선교(禪敎) 양종을 일체로 수행해낸 곳도 여기다. 물론 다 같이 ‘마음’을 문제 삼더라도 노장과 유가는 사람의 마음(心)속에 자연을 불러들여 인성과 천리의 일체를 ‘자연이연(自然而然)’ ‘천진(天眞)’ ‘괴(怪)’로 유희하고 필획(筆劃)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가와 다르다. 이것은 조선 문인들이 다 그러하지만 양사언의 광초(狂草)와 이황의 퇴필(退筆), 추사체(秋史體)와 같은 글씨를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특히 만년의 추사가 “요구해 온 서체는 본시 처음부터 일정한 법칙이 없고 붓이 팔목을 따라 변하여 괴(怪)와 기(奇)가 섞여 나와서 이것이 금체(今體)인지 고체(古體)인지 나 역시 알지 못한다”(<완당전집>)고 한 대로 ‘카오스모스’ 세계다. 이미 150여년 전 현대미술은 물론 언예일치(言藝一致)로 미술의 내일까지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2022년을 사는 오늘 우리다. 정작 우리 역사에서 전개된 다층다기한 서(書)의 세계는 망각되고, 그 맥락 단절 상태는 더 심화되고 있다. 물론 이 결과는 ‘서(書)는 미술도 예술도 아니다’라는 식민지 시대 서구 잣대를 ‘자연이연’으로 인정사정없이 들이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세기 100년을 돌고 돌아 이제 다시 붓으로 미술을 들배지기할 때가 왔다. ‘진도에는 개도 붓을 물고 다닌다’는 말은 옛말이 아니다.
이동국 예술의 전당 수석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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