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의 문헌 속 ‘밥상’] 피 묻은 빵과 저급한 사과를 잊지 않겠다
“잊지 않겠습니다”라니. 사람이 잊지 않는다니. 영원하자던 사랑의 맹세마저 잊을 수 있는 존재가 사람이다. 사람은 암송해서, 그려서, 써서, 녹음·녹화해서, 기록이라는 행위를 해왔다. 본격적인 기록물은 따로 문헌이라 일컬어 애지중지했고, 문헌을 문헌답게 쓰자고 문헌정보학이라는 학문의 체계까지 만들어냈다. 그러고도 잊는다. 잊기, 망각은 인간의 벽이 아니라 조건이다. 그래서 자꾸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아득인다. 별다른 수는 없다. 구체적으로 호명하며 되풀이해 아득이는 수밖에는. 그래서 다시 냉정하게 아득인다.
2022년 10월15일 오전 6시20분쯤 대한민국 경기 평택시 팽성읍 추팔산단1길 157에 자리한 SPL주식회사 공장에서 20대 노동자가 샌드위치 소스를 배합하는 기계에 상반신이 끼여 사망했다. 참고로 이 회사의 이전 회사명은 SPC로지스틱스이다. 2004년 설립 당시 “최고의 경쟁력을 확보한 ‘세계 최대의 생지 공장’ ”을 목표로 했고, “SPC그룹의 성장 동력원으로 변모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며 오늘에 이르렀단다.
이 공장에서 숨진 고인은 고등학교에서도 제빵을 공부했고 내 빵 가게를 내는 꿈을 꾸며 회사원으로 살아가던 청년이었다. 고인은 14일 20시부터 ‘12시간 맞교대’로 일하기 시작해 10시간20분째 일을 이어가다 사고를 당했다. 이 소식을 처음 알린 경인일보에 따르면 사망한 노동자의 작업은 ‘재료를 300㎏ 용량의 배합기에 부어 작동시킨 뒤, 완성된 혼합물을 15㎏쯤의 알루미늄 용기에 부어 담고, 다시 옆에 있는 2m 높이의 12단 수납함에 담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이 작업은 2인 또는 3인 1조로 진행되어야 하지만 회사는 늘 안전을 무시한 속도전이 전부였다. 게다가 끔찍한 일이 벌어진 기계에는 안전장치마저 없었다.
여기서 얄궂은 ‘문헌’을 하나 더 살펴보자. 서울시 서초구 양재동 남부순환로 2620에 주소를 둔 SPC그룹 웹페이지 속 계열사 소개에 따르면, SPL은 “아시아 최대의 휴면 반죽 메이커”이고 “최첨단 설비”를 갖춘 “아시아 최대 규모의 베이커리 생산 공장을 운영”한다. 휴면 반죽이란 냉동 상태에서도 효모나 유산균이 죽지 않고 잠들어 있는 반죽이다. 최첨단기술과 어마어마한 시설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다. 이만 하니 SPC가 파리바게뜨, 배스킨라빈스, 던킨, 삼립, 파리크라상, 패션5, 빚은, 샤니, 베이커리팩토리, 쉐이크쉑, 에그슬럿, 라그릴리아, 시티델리, 퀸즈파크, 베라, 라뜰리에, 그릭슈바인, 스트릿, 디퀸즈, 리나스, 한상차림, 파스쿠찌, 잠바주스, 커피앳웍스, 티트라, 해피포인트, 더월드바인 등을 거느릴 수 있을 테다. 그러고 보니 이들 브랜드도 ‘잊지 않’아야겠다. 다시 아득인다.
SPL 대표이사 강동석은 10월31일 “고인과 유가족분들께 깊은 애도와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고 사과했다. 하지만 사과문은 유가족이 볼 수 없는 회사 게시판에 붙었다. 앞서 SPC 회장 허영인은 10월21일 발표한 사과문에서 “모두 제가 부족한 탓” “더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제대로 전하지 못한 저의 불찰” 운운했다. 이 둘의 사과문 전문 또한 세기를 건너 음식문헌으로 남도록 저장한다. 여기 깃든 저급함과 유치함과 봉건성까지, 다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다. 끝으로 아득인다. 피 묻은 빵과 과자, 피 묻은 떡, 피 묻은 케이크는 못 먹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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