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끌족이 영털족 됐다
대기업에 다니는 정모(35)씨는 지난달 마이너스통장을 연장하며 금리 인상을 실감했다. 연 5.3%였던 금리가 갑자기 7.291%로 뛴 것이다. 결국 이자를 한 푼이라도 아껴보려 15년간 유지한 청약통장(600만원)을 깨 빚 갚는 데 썼다. 정씨는 “청약 기회를 날려버리는 게 아깝기는 했지만, 금리 오르는 속도가 더 무섭더라”며 “연말 성과급도 곧장 대출 조기 상환에 쓸 것”이라고 했다.
금융 당국의 수신금리 인상 자제령 이후 연 5%를 넘던 시중은행 정기예금 금리가 지난달 4%대로 떨어졌지만, 대출금리는 상승 추세를 이어간 것으로 나타났다. 22일 은행연합회에 따르면 11월 5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신용대출(서민금융 제외) 금리는 연 6.43~7.26%로 일제히 6%대 중반을 넘겼다. 5대 은행 신용대출 평균 금리는 연 6.68%로 두 달 전에 비해 1.18%포인트나 올랐다. 급격하게 불어나는 이자에 대출자들 사이에선 “영끌족(영혼까지 끌어모아 대출받음)’이 ‘영털족’(영혼까지 탈탈 털리는 대출) 신세가 됐다”는 하소연이 나오고 있다.
농협은행 평균 금리가 7.26%로 가장 높았고, 이어 신한(연 6.73%), 국민(6.57%), 하나(6.45%), 우리(6.43%) 순이었다. 한 달 전인 10월에는 KB국민은행(연 5.99%)과 하나은행(연 5.79%) 금리가 5%대였는데, 모두 6%를 넘은 것이다. 은행별로 한 달 새 대출금리 오름 폭은 0.4~0.7%포인트에 달했다.
◇일제히 6%대 중반 넘긴 신용대출 금리
신용점수 951점 이상 고신용자도 고금리를 피해갈 수 없었다. 지난달 고신용자들이 적용받은 신용대출 평균 금리는 연 6.11~6.55%에 달했다. 금리가 오르면서 금리가 연 4~5%대로 낮은 신용대출은 점점 더 받기 힘들어졌다. 지난달 신한은행에선 연 5% 미만 신용대출(신규)을 아예 취급하지 않았다. 우리은행과 NH농협은행에서는 연 3%대 신용대출이 사라졌다.
마이너스통장 평균 금리는 7%에 바짝 다가서고 있다. 지난달 실제 취급된 5대 은행의 마이너스통장 평균 금리는 연 6.77~7.29%로 집계됐다. 신용점수 951점 이상인 고신용자들도 연 6.62~7.15%의 금리를 적용받았다. 대출자들이 이자 부담 탓에 빚을 서둘러 갚으면서 이들 5대 은행의 11월 말 마이너스통장 잔액은 지난 1월 말 대비 4조9891억원이나 감소했다.
일부 대출자는 상대적으로 금리가 낮은 보험계약대출(약관대출)로 눈을 돌리기도 한다. 보험을 유지하면서 보험 해약 환급금의 50~95% 한도로 대출받는 약관대출은 평균 금리가 연 4~5% 수준이다. 지난 9월 말 생명보험사 약관대출 잔액은 47조7625억원으로 6월 말(44조3978억원)에 비해 7%(3조3647억원) 증가했다.
◇당국 압박에 이달 들어 소폭 내렸지만
다만 12월 들어서는 은행권 대출금리가 소폭 떨어지고 있다. 이달 1일 연 6.20~7.47% 수준이었던 5대 은행 신용대출 금리가 3주 만에 6.22~7.25% 수준으로 한풀 꺾였다. 같은 기간 신한은행과 하나은행 주택담보대출 금리 역시 0.22%포인트, 0.12%포인트씩 떨어졌다. 우리은행은 지난 9일 전세대출 금리를 최대 0.85%포인트 인하했고, NH농협은행은 다음 달 2일부터 전세대출 금리를 최대 1.1%포인트 인하할 예정이다.
이 같은 금리 인하 행렬은 금융 당국이 이달부터 은행권 대출금리 전수조사에 나서며 압박한 영향으로 보인다. 10월 말 중단됐던 은행채 발행이 두 달 만인 이달 19일부터 재개되며 은행들의 대출금리 인하 여력이 늘어난 이유도 있다. 가계대출 금리 상승세에 제동이 걸린 것은 작년 5월 이후 19개월 만이다.
다만 이런 분위기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당국이 개입해 대출금리를 누르고 있지만, 향후 기준금리 인상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과의 금리 격차 등을 고려해 당장 내년 1월부터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추가 인상할 것이 유력하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지난 20일 “(최종) 기준금리 3.5%는 (물가 상황 등) 전제가 바뀌면 달라질 수 있다”며 추가 인상 가능성을 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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