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재벌집 막내아들’처럼
요즘은 <재벌집 막내아들> 보는 재미로 산다. 이런 드라마가 왜 16부작으로 끝나야 하는지 아쉽다. 이 추운 겨울을 그럭저럭 지날 수 있도록 2편, 3편을 이어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난여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덕에 더위를 잠시나마 식힐 수 있었던 것처럼.
교육과 연구만으로도 하루 24시간이 벅차야 할 교수의 직분을 망각하고 통속적인 판타지 드라마에 놀아나는 게 꼴불견일 수도 있다. 그러나 파독간호사 출신 노은님 화가의 통찰처럼 “살아남는다고 전쟁터 병사처럼 싸울 필요는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하루 24시간을 오로지 일에만 쏟아내는 건 바로 인간의 존엄과 행복추구권에 반하는 게 아닌가.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에 배치되어 주어진 일만을 수행해야 한다면 그게 기계지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미 20세기 초에 불세출의 대가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가 산업사회의 비인간성을 통렬하게 풍자한 바 있지 않은가.
기껏 드라마 보기를 합리화하기 위해 너무 나갔나. 아니다. 개발국가 시대의 재벌가를 배경으로 한 이 드라마는 한국 사회의 당면 과제를 압축적으로 조명해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자본이 노동은 물론 가족 관계까지 장악한 현실에서 정작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를 묻고 또 물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마련해 주고 있다. 바로 인간의 존엄과 행복이다.
예컨대 저출생 고령화 사회로 진입한 대한민국이 10여년간 100조원이 넘게 쏟아붓고도 인구절벽을 맞이하고 있는 근본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인간의 존엄과 행복은 오로지 일과 그 대가인 돈에만 있는 것처럼 강요하는 사회제도와 사회문화는 아닌가. 인구절벽을 해소하는 대책마저도 일과 돈에만 지나치게 의존하고 정작 본질이어야 할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족의 가치는 뒷전이다 보니 백약이 무효인 것은 아닌가.
보통 우리나라에서 사회제도와 사회정책을 설계할 때 선택지로 제시되곤 하는 미국모델과 유럽모델이 사실은 공통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 근본가치가 있다. 바로 가족이다. 개인적 자유주의의 대명사인 미국이나 상대적으로 사회적 자유주의의 경향이 강한 유럽 모두 개인의 자유 못지않게 가족이 사회의 기반이라는 가치에 있어 일치하는 문화와 제도를 구축하고 있다. 공공영역은 말할 것도 없고 민간영역에서도 임신, 출산과 양육 등 가족의 형성에 필요한 기본적 과제는 사회 전체가 책임져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다.
사실 우리나라도 국가와 사회의 기본규범인 헌법은 이러한 근본가치 중심의 공동체를 선언하고 있다. 국가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추구권에 터 잡은,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인권을 확인하고 보장하기 위해 존재한다(제10조).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지며, 여자의 복지와 권익의 향상, 노인과 청소년의 복지향상 등 인간의 존엄을 중심으로 사회가 돌아가도록 노력할 숭고한 의무를 국가에 부과하고 있다(제34조).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하고 모성의 보호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일 책무 또한 국가의 몫이다(제36조). 균등한 교육을 받을 권리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근로조건을 구성한 근로의 권리 또한 국민의 기본권이다(제31조와 제32조).
그러나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은 재벌가의 기업경영이나 승계를 둘러싼 골육상쟁뿐만 아니라, 오너 리스크를 관리하는 특별사원인 전생의 아들과 파업 노동자의 멍에로 삶의 바닥에서 허우적거리는 아버지의 삶이, 모두 전쟁터와 같음을 극적으로 대비시키고 있다. 비록 도식적이긴 하지만 이미 최장 노동시간 국가 그룹에 속한 오명에도 불구하고 노동시간 연장과 ‘노동적폐’의 청산에 몰두하는 대통령이 이 전쟁터에서 누구 편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훌륭한 교육보조재로서의 역할을 이 드라마가 톡톡히 하고 있다.
1980년대로 회귀하여 21세기 초반에 이른 현재까지 전개되는 이 드라마의 시간 프레임은 <모던 타임즈> 못지않게 우리의 미래를 비추는 반면교사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엉뚱한 상상을 한다. 미래의 막내아들이 재벌가가 아닌 대통령가에 환생한다면 신들린 듯 이성민 배우가 쏟아내는 재벌총수의 일갈이 어떻게 각색될지 궁금하다. “머슴을 키워가 등 따습고 배부르게 만들면 왜 안 되는 줄 아나? 지가 주인인 줄 안다.” 명색이 민주공화국에서 마치 왕이나 된 듯 헌법이 공화적 책무를 부여한 야당, 언론, 노조를 때려잡는 장면에 열연을 펼칠 대통령 역으로는 어떤 배우가 적격일지도 흥미로운 포인트일 수 있다. <재벌집 막내아들>도 곧 끝나고 이래저래 뒤숭숭한데 신통하다는 도사에게 한번 물어볼까?
김종철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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