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시선] 빛은 들어오고, 벽은 무너져 내릴 것이다

2022. 12. 23.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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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 자기모순' 사로잡힌
개인·집단은 미래 없어
북한을 괜찮다고 말하는 자는
성경을 옆에 낀 노예사냥꾼
민주화세대 할일은 '北민주화운동'
이응준 시인·소설가

안톤 후쿠아 감독의 영화 ‘해방’에 나오는 장면이다. 미국 남북전쟁 시기, 백인 가족이 발코니 테이블에 둘러앉아 식사 기도를 하고 있다. 불현듯 만신창이 흑인 노예가 수풀에서 튀어나와 정원을 가로질러 뛰자, 백인 소녀는 종을 난타하며 “도망 노예다!”라고 연신 악을 써 근처에서 뒤쫓고 있는 노예 사냥꾼들에게 알린다. 방금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던 소녀가 말이다. 그 ‘검둥이’는 노예수용소를 탈출해 북부군 진영을 찾아가고 있었다.

남북전쟁으로 북부 2200만, 남부 900만 인구 중 군인 70만 명이 사망했다. 미국이 양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에서 잃은 군인들을 다 합친 수보다 많다. 북부군 흑인 병사는 18만 명 중 4만 명이 전사했다. 1807년 영국 의회가 노예무역을 금지하자, 미국은 자국 내 흑인 노예들을 가축 불리듯 증가시킨다. 흑인 노예 한 명 가격은 1790년 300달러에서 1850년 2000달러, 그 수는 1800년 100만 명에서 1860년 400만 명에 이르렀다. 경제적 정치적 ‘이득’ 다툼이 남북전쟁의 진짜 원인이라고들 한다. 노예해방의 진정성은 빛 좋은 껍질에 불과하다는 건데, 사실이 진실을 부정하는 꼴이다. 진실은 도식적이지 않다. 북부에도 노예제 찬성자가 있었고 남부에도 노예제 반대자가 있었다. 역사는 단순하지 않다. 1987년 그 여름, 전두환의 적이었다고 해서 다 대한민국의 편이거나 ‘자유’민주주의자는 아니었던 것처럼.

1852년 해리엇 비처 스토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 출간된다. 금서가 된 남부에서조차 노예제에 위협이 되었다. 키가 193㎝인 링컨은 스토 부인을 처음 만나서 말했다. “작은 여인이 이 거대한 남북전쟁을 일으켰군요.” 스토의 아버지 비처는 목사이자 신학교 교장이었다. 한데 노예제 찬성자였다. 노예제 반대자들에게 소총을 보내 겁박한 탓에 ‘비처의 소총’이라는 유행어까지 생겼다. 스토가 저 <해방> 속의 백인 소녀였다 한들 유별난 일이 아니었다. 북한의 전체주의 노예 인민들과 강제수용소를 그러려니 여기는 우리들처럼. 그러나 스토는 자신의 ‘결정적 자기모순’을 거부했다. 도망 노예를 도와준 사람까지 처벌하는 도망노예송환법이 통과되자, 그녀는 아이들을 재운 밤마다 톰이라는 ‘검둥이 예수의 이야기’를 집필했다.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는 이 시각에도 북한을 탈출하는 이들은 흑인 노예처럼 쫓기며 국경과 죽음을 떠돌고 있다. 링컨을 올려다보며 스토가 한 대답은 이랬다. “그 소설을 쓴 건 제가 아니었습니다. 노예제도를 보고 노여워하신 하나님이었어요. 저는 도구였을 뿐입니다.” 문학이 세상을 변하게 할 수는 없어도 세상을 변화시키는 한 사람을 호명(呼名)할 수는 있다. 그 한 사람은 링컨이었을까, 스토 부인이었을까.

한때 노예제에 대한 링컨의 애매한 언급은 살육과 통합에 대한 고뇌 때문이었다. 그는 분명 ‘디벨롭(develop) 되어갔고’ 노예해방을 선언했고 수정헌법 13조를 관철시켰고 전쟁에서 승리했고 그 5일 뒤 암살자의 총탄을 맞았다. 이후 미국은 흑백문제가 있으되 ‘결정적 자기모순’은 해결했다. 아니었다면 북, 남 중 어디가 이겼든지 북아메리카는 미합중국이 사라진 채 멕시코 수준의 몇 개 나라들로 구성돼 있을 것이다. 캐나다는 ‘소련’의 일부분일 수도 있다.

‘결정적 자기모순’에 사로잡힌 개인이나 집단은 미래가 없다. 중산층이 형성된 인민에게 ‘자유’를 주지 ‘못하는’ 중국이 그렇고, 마르크스가 봤다면 기절할, 자식에게 세습까지 하는 귀족 조폭 노조가 그렇다. 다만 희망적인 것은 사람들이 저들을 역겨워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증오보다 무서운 게 혐오다. 대중이 자신의 감정을 확인하게 되는 시절이 바로 ‘역사의 변곡점’이다. 현재의 북한을 괜찮다고 말하는 자는 혀가 보석인들 성경을 옆에 낀 노예 사냥꾼일 뿐이다. 이게 우리의 ‘결정적 자기모순’이다.

정말로 민주화 세대가 있다면 그들이 할 일은 도망노예송환법을 따르는 게 아니라 북한 민주화운동이다. 지난 10월, 혜산에서 북한 청소년 세 명이 공개 총살당했다. 그중 둘은 한국 영화를 본 게 죄목이었다. 가진 게 펜밖에 없어 쓰고 또 쓰건만 헛된 일처럼 여겨져 낙담하게 된다. 그러나 믿고 싶다. 균열을 내면 빛은 들어오고, 벽은 무너져 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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