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공간 디자이너’ 박정희가 서울을 현대 도시로 만들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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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활기차게 북적이는 연말이 도대체 몇 년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인파 밀집을 우려해 크리스마스 이브엔 명동에 노점상이 나오지 못하게 했다는 뉴스를 보고, 이제 사회가 상당 부분 일상을 회복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2020년 이전의 서울은 원래 활기찬 도시였습니다.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로 시작하는 ‘서울의 찬가’의 가사처럼 활력과 자유가 넘치는 도시였다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 외국인들이 유튜브에 앞다퉈 올려대는 서울에 대한 찬사는 그걸 다시금 깨닫게 합니다.
그런데 이 ‘서울’의 모습을 디자인한 사람이 과연 누군지에 대해, 몇 년 전에 나온 연구서가 있었습니다.
조선일보 칼럼으로도 익숙한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가 쓴 책이었습니다. ‘공간 디자이너 박정희’(기파랑)입니다.
디자이너 박정희라니? 이것은 우리가 쓰는 통상적인 개념의 디자이너라기보다는 ‘서울을 이런 도시로 만든다’는 총괄적인 계획을 수립한 사람이 사실상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는 말입니다.
전 교수는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를 집필한 손정목(1928~2016) 전 서울시 기획관리관의 말을 인용합니다.
“서울시내 도처에 파여 있는 지하도도 그에게 보고된 후 굴착되었고 그 숱한 도로의 신설·확장 또한 모두 그에게 보고된 후에 착수되었으며, 세운상가도 한강건설도 강남개발도 그에게 보고된 후에 착수되었다. 여의도광장이나 잠실개발, 도심부 재개발, 소공동 롯데타운 등도 그의 직접 지시에 따라 이루어졌다. 지하철 종로선도 그의 지시에 따라 건설된 것이고 지하철 2호선은 그의 재가를 받은 후에 노선 자체가 변경·추진되었다. 능동에 있는 어린이대공원은 그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졌고 과천에 있는 서울대공원도 그가 깊숙이 관여했다. 경부·경인고속도로도 과천 신도시 건설도 개발제한구역도 행정수도도 모두 그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졌다. 이것들은 그 누군가 건의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착상한 것이었다.”
전상인 교수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수도인 서울시 도시계획 전반에 걸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그의 유산은 서울시 도처에 아직 남아있다. 고도 경제성장기 1960년대와 70년대, 서울은 조국근대화의 표상이자 경제발전의 최대 수혜 도시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변화하는 서울의 모습은 그 무렵 보편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TV와 라디오 등을 통해 나라 곳곳에 중계 방송되었고, 그 소식과 영상을 쫓아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서울로 더욱더 몰려들었다. 그 이면에서 박정희 정부는 적극적인 인구분산 정책을 실시하는 한편, 기반 시설 확충 및 시가지 확대 재편 등을 통해 서울의 질적 쇄신을 구상하였다.”
그때 전상인 교수를 만나서 물어봤습니다.
“대한민국의 20세기 후반기, 좀더 정확히는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 기간에 일어난 변화를 ‘공간 혁명’이라고 하셨는데, 지나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 않을 텐데요.”
그러자 전 교수가 말했습니다.
“한국 경제가 본격적으로 성장한 1960~70년대는 국토와 도로, 도시 공간이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킨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그 중심에 있었던 ‘디자이너’가 바로 박정희였죠.”
“경제 성장뿐 아니라 ‘공간’도 함께 생각했다는 겁니까?”
“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2년부터 1966년까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할 단계에 이미 ‘공간’을 염두에 두고 전체 국토를 바꾸는 일에 나섰던 겁니다.”
조선시대엔 ‘무도즉안전(無道則安全)’이란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길이 없어야 안전하다’는 것이죠. 풍수론이 대세를 이룬 조선시대에는 국토 개발이라는 개념이 없었고 길을 내는 것이 오히려 화를 불러온다는 인식까지 있었다는 얘깁니다. 일제 치하에선 대륙 침략을 목적으로 삼은 남북의 불균형 발전이 이뤄졌습니다. 광복 직후엔 국토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고, 전쟁을 겪은 1950년대엔 복구에 정신이 없어 그저 임시방편적인 대응을 할 뿐이었다는 얘깁니다.
그러나 1960년대에 오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지게 됐다는 것입니다. 전 교수는 “총괄계획가 박정희의 종합적인 설계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국토와 교통, 도시와 주택과 환경이 긴밀하게 연결된 계획이었습니다. 수도권과 남동 임해권을 중심으로는 산업단지가 건설됐고, 철도와 도로(물론 도로 중심이긴 했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만), 핵심 물류 인프라인 항만과 항공 교통이 그것을 연결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엔 1964년의 서독 방문이 큰 계기가 됐다고 합니다. 에르하르트 총리는 박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어디 공장만 만든다고 경제가 발전하는 줄 아십니까? 도로도 만들고 항만도 지어야죠!” 물론 에르하르트는 신생 후진국의 대통령이 자기 말을 그렇게 충실히 이행할 것이라곤 짐작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아우토반! 자동차가 쏜살같이 달리는 서독 고속도로를 보고 박 대통령은 아예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당시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파격적 발상이 나오는데, 바로 경부고속도로였습니다. 길이라 해 봐야 비포장 자갈길이 대부분이었던 시절에 그는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에 성공했습니다. 전 교수는 “경부고속도로는 그 자체로 성공에 대한 확신이자 미래에 대한 기대였다”고 말했습니다.
그 뒤에 나온 것이 주택 정책이었습니다. 전 교수는 “급격한 산업화로 인한 도시 과밀 정책에 대응한 ‘선제적(先制的) 주택 정책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는 19세기 프랑스에서 주택을 대량 공급한 것에 대해 ‘건축으로 혁명을 막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혁명이란 사회주의 혁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박정희는 아파트를 대량 공급해 중산층을 육성, 대한민국을 체제 위기에서 구해 냈다는 것입니다.
1977년에 나온 윤흥길의 소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나 비슷한 시기 TBC TV 드라마 ‘야 곰례야’ ‘달동네’의 배경은 당시 흔히 볼 수 있었던 셋방살이의 풍경이었습니다. 과연 어떤 생활환경이었던가요? 집주인도 세입자도 모두 프라이버시 같은 건 없었습니다(당시엔 ‘프라이버시’란 말조차 생소했고, 이 단어를 완전히 대체할 우리말은 사실상 아직도 나오지 않은 상태입니다). 옆집에서 오늘 하루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알면서 살 수 있었습니다. 알리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은 일까지 말이죠. 화장실도 순서가 있었고, 내 자식이 집주인 아들보다 공부를 잘해서도 곤란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풍경을 좀처럼 볼 수가 없습니다. 왜?
아파트가 대중화됐기 때문입니다.
늘 집을 보느라 ‘집사람’ ‘안사람’이라 불리던 여성들도 더 이상 집안에 있지 않게 됐습니다. 현관을 잠그고 얼마든지 자신만의 자유로운 일상을 누리는 환경이 된 것이죠. 이것이 아파트가 한국인에게 가져다 준 ‘공간 혁명’이었습니다. 공동체적 삶에서 개인 사생활이 보장되는 ‘도시형 개인’으로 아주 단기간에 탈바꿈했다는 것이죠.
제 생각에, 돌이켜 보면 ‘총화단결’을 외치던 유신 시절에 ‘개인의 공간’이 탄생했다는 것은 분명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것입니다.
서울의 ‘공간 현대화’는 1966~1970년 김현옥 서울시장 재임 기간 가장 엄청난 변화를 겪었습니다. 강변북로, 세운상가, 여의도 윤중제, 북악스카이웨이, 남산 1·2호 터널, 서울역 고가도로, 시민아파트가 건설됐고, 오늘의 서울을 있게 한 뼈대인 서울시 도시기본계획이 수립됐습니다. 1966~19080년의 15년 동안 서울시는 주택지, 도로, 상하수도, 지하철 등의 기본 도시 인프라를 거의 갖추게 됐습니다.
물론 박정희의 공간 정책에는 분명 한계와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전 교수는 “효율성을 강조하다 보니 평준화와 공산품화(化)가 두드러졌고, 결과적으로 수도권에 과도한 쏠림 현상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큰 기념물을 세우는 데 급급해 결국 ‘거대한 연극 세트장’을 만들고 만 김일성의 평양과는 달랐습니다. 박정희의 서울은 개인 숭배와 도시계획을 결합하지 않았고, 화려하고 과시적인 모습을 오히려 자제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요. 서울은 활력과 자유가 넘치는 ‘시민의 도시’가 됐다는 것입니다.
전상인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문명의 발달은 각종 도시계획으로 이루어지는 법이다. 박정희 집권기간 동안 우리나라의 국토는 실로 상전벽해가 되었고 박정희의 공간 혁명으로 한국은 근대화와 한강의 기적을 이룰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박정희의 공간 정책은 1960~70년대 ‘개발독재’ 시절에서나 가능할 법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공은 공대로 남기고 과는 과대로 고치면 되는 것이 역사의 발전이 아닌가 한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설명해드립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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