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곳곳에 스며든 예술혼… 미술전시장으로 변신한 삼다도
김예진 2022. 12. 22. 21:37
제3회 제주비엔날레 개막
위성전시장 삼성혈 등 6개 공간에서
‘움직이는 달, 다가서는 땅’ 주제 개최
존폐 위기론 딛고 3년 만에 다시 열려
기후위기 시대 지구적 공생 모색 취지
위성전시장 삼성혈 등 6개 공간에서
‘움직이는 달, 다가서는 땅’ 주제 개최
존폐 위기론 딛고 3년 만에 다시 열려
기후위기 시대 지구적 공생 모색 취지
서걱서걱 낙엽 수북한 땅을 밟는 소리가 무겁게 깔린다. 조심스럽게 내디딘 발걸음 사이마다 새 울음소리가 숲속에 울려 퍼진다. 해 질 녘 숲속 고목이 큰 키보다 더 기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차고 맑은 공기까지 신성하게 느껴지는 제주 삼성혈 안, 수백년 된 나무 기둥들 사이로 희미한 선들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이 선들은 나무가 서로에게 드리우고 있는 그림자에 가려지기도, 석양빛을 받아 반짝이기도 하면서 은은하고 신비로운 광경을 연출한다. 마치 평소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서로가 운명적으로 연결돼 있는 지구 공동체 안 생명체들의 관계를 드러내는 듯하다. 이 작품은 명주실로 한 가닥 한 가닥 가지런히 나무를 감싸 안듯 연결한 신예선(49) 작가의 ‘움직이는 정원’이다.
지금 제주 곳곳에는 예술이 스며들어 있다. 제3회 제주비엔날레가 열리면서다. ‘움직이는 달, 다가서는 땅(Flowing Moon, Embracing Land)’을 주제로 제주도립미술관과 제주현대미술관, 삼성혈, 제주국제평화센터, 제주 전통가옥을 보존해 문화공간으로 조성한 ‘미술관옆집 제주’, 가파도 내 예술가 레지던스인 ‘가파도 AiR(아티스트 인 레지던스)’ 총 6개 공간에서 펼쳐지고 있다. 인류세 등 새로운 지질학적 개념이 제기되는 기후위기 시대에 전 지구적 공생을 향한 예술적 실천을 모색한다는 취지다.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전시감독,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본부장, 국제전자예술심포지엄 예술감독 등을 맡았던 박남희 예술감독이 지휘봉을 잡고 16개국 작가 55명(팀)이 참여해 제주도를 예술섬으로 변신시켰다.
특히 위성전시장으로 선택된 곳과 거기에 설치된 작품은 유독 깊은 인상을 주면서, 미술관 밖에서 예술을 경험하는 특별한 기회가 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인 제주시 삼성로에 위치한 위성전시장 삼성혈은 제주도 개벽 신화 주 무대다. 탐라국 시조 ‘삼신인’인 고씨, 양씨, 부씨 시조가 솟아났다는 3개 구멍이 있는 곳으로 조선 중기부터 신성시돼왔다. 땅 위 세 구멍은 수백년 된 고목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나뭇가지들이 혈을 향해 경배하듯 고개를 숙이고 있는 형태여서 신비롭다. 비나 눈이 많이 내려도 삼성혈에서만큼은 내린 눈비가 고이거나 쌓이지 않는 점도 제주 사람들이 삼성혈을 더욱 신성하게 바라보는 이유다.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돼 있다.
뽕나무 잎으로 친 누에고치에서 뽑아낸 명주실, 자연에서 온 명주실이 다시 나무를 감싸 안고 있는 모습은 보는 이를 압도하는 화려한 시각 작품이 아닌데도 삼성혈 신비로운 숲속에서 경이롭게 보인다. 역사와 신화에 예술이 더해져 감동을 선사한다. 연결되고 공생하는 지구 공동체의 은유처럼 다가오기도 하고, 숲속에 은은한 벽이 생겨 공간을 구획해 보이지 않는 생명들이 집을 건축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작가는 삼성혈 내 식생 분포도를 분석해 제각기 비중에 따라 다른 색 명주실을 써 고목을 연결하는 설치 작품을 만들었다. 박 감독은 “작품은 자연과 인간, 생명들이 서로 순환하는 자연 공동체의 일부라는 걸 보여주고 대지 위의 3개 구멍은 인간이 태어난 시작점과 돌아갈 곳을 동시에 보여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제주도에서 또다시 배를 타고 들어가는 작은 섬 가파도 역시 인상적이다. 예술가들이 수개월씩 머물며 작업에 몰입할 수 있도록 조성된 창작공간 가파도AiR가 전시장으로 변해 관람객에 개방됐다. 심승욱(50) 작가의 뒤틀리고 기괴한 구조물이 가파도AiR 야외공간에 매달려 태평양에 부는 바람을 따라 흔들리고, 섬 안 또 다른 건축물 글라스하우스에서는 홍이현숙 작가가 가파도에서 모은 실제 해양쓰레기들을 전시한다. 이탈리아 작가 아그네스 갈리오토(26)는 가파도에 버려져 있던 폐가 내부에 프레스코화를 그려 채웠다. 이들의 작품은 자연 공동체 일원으로서 인간의 자리, 삶의 태도를 다각도로 일깨운다. 또 다른 작가 레지던스인 ‘미술관옆집 제주’는 그런 삶의 태도가 실현되고 있는 살아 있는 예술 실천 현장을 보여준다.
제주비엔날레는 2017년 1회, 2019년 2회 미술제를 개최했다. 이름 그대로 ‘비엔날레’인 만큼 2년에 한 번씩 열려야 했지만, 곡절을 겪으며 존폐 위기론까지 나오다 3년 만인 올해 열렸다. 통상 봄, 가을에 열리는 미술제들과 달리 이례적으로 2022년 끝자락에 개막했다. 그러나 본모습을 드러낸 이번 비엔날레는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인상적으로 지역에 스며든 결과물로 호평을 받으며 우려를 털어냈다. 유독 위로가 필요한 계절에 찾아온 미술제는 박 감독이 영감을 받았다는 허균의 ‘한정록’ 문구와도 공명한다.
“고요함이 극에 달하면 봄 못 속 물고기처럼 미미하게 숨을 내쉬며, 움직임이 극에 달하면 칩거한 온갖 벌레처럼 고요하게 숨을 들이쉰다. 고른 호흡은 이것과 같다.”
지구 공동체 객체로서의 인간이 자연의 고요하고 깊은 숨결을 따라가며 호흡하는 듯한 분위기가 예술품 곳곳에서 흐른다. 김기라(48) 작가가 정세원 음악가와 협업한 작품 ‘비비디바비디부-내일은 검정-우린 알아-우리가 다시’ 영상과 음악이 흐르는 미술관 로비에 김수자(65) 작가의 특수 필름이 자연광을 은은한 무지갯빛으로 드리우는가 하면, 미술관 밖 외관에 김주영(74) 작가의 ‘뱃길 따라 - 망향’이 원래 그 자리에 있는 건축물의 일부처럼 어우러진다. 가늘고 길게, 고요하고 깊게, 있는 듯 없는 듯 펼쳐진 예술품들은 이번 비엔날레가 말하고자 하는 삶의 태도를 보여준다. 내년 2월12일까지.
제주·서귀포=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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