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랑아 착취해 편취한 돈, 정치자금으로 쓰였을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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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지역 부랑인시설로 인권유린의 시초인 '영화숙·재생원' 이순영 원장이 소유했던 기업체나 토지 일부가 아들 등 일가에 의해 관리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영화숙 운영 당시 이 원장은 10년 이상 구호물품을 횡령해 되팔아 개인 명의의 땅을 산 혐의 등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22일 취재를 종합하면 이 원장은 법인이 해산한 1977년 전후로 사하구(당시 부산시 직할 사하출장소) 신평·장림동 일대에서 여러 기업체를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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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장, 인근서 여러 기업체 운영
- 자녀가 물려받아 운영하는 곳도
- 차남은 22년 전 국회의원 출마
- 자서전서 “정치인인 백부 위해
- 아버지, 여러 사업 벌였다” 언급
부산지역 부랑인시설로 인권유린의 시초인 ‘영화숙·재생원’ 이순영 원장이 소유했던 기업체나 토지 일부가 아들 등 일가에 의해 관리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영화숙 운영 당시 이 원장은 10년 이상 구호물품을 횡령해 되팔아 개인 명의의 땅을 산 혐의 등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22일 취재를 종합하면 이 원장은 법인이 해산한 1977년 전후로 사하구(당시 부산시 직할 사하출장소) 신평·장림동 일대에서 여러 기업체를 운영했다. 축산업체인 J 사와 사료 혼·배합 제조업체인 D공업, 소·돼지를 키운 J 농장 등이다. 모두 영화숙 근처에 있다.
한 차례 업체명을 바꾼 D 공업은 현재도 신평동에서 공장을 운영한다. J 사는 부산진구로 옮겨 무역업체로 운영되다 2008년 폐업했다. J 농장은 자취를 감췄는데, “돼지·소에게 밥을 먹이고 축사를 관리했다”고 증언한 생존피해자가 적지 않았다는 점에서 강제노역이 이뤄진 곳으로 추정할 수 있다.
업체는 장남 A(69) 씨와 차남 B(66) 씨가 대표 자리를 이었다. 장남이 D 공업을, 차남이 J 사를 물려받았다. 1981년 1월 이 원장이 사망한 뒤 승계했다. 이들의 동생 C(58) 씨도 J 사 등기 이사로 재직했다. B 씨는 폐업 이후 또 다른 산업체 대표를 지냈는데, 옛 영화숙·재생원이 자리한 부지(현 신평동)에 주소를 뒀다.
B 씨는 정치인으로도 활약했다. 한나라당 전 대표최고위원 특보 출신으로 2000년 무소속으로 부산의 한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애초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할 예정이었지만 ‘공천 헌금’ 논란에 휘말려 공천이 취소됐다. 헌금을 마련하려고 땅을 팔았다는 의혹에 “사실이 아니다”고 반박했으나 결과를 뒤집지 못했다.
출마 당시 B 씨는 공보물에 ‘한국 최대의 사회사업가 이순영 님의 차남’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부산진에서 야당 3선 국회의원으로 독재에 항거하다 고문으로 불구가 된 백부 이모 의원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야당 정치를 알게 됐다’고도 밝혔다.
2003년 출간한 자서전에는 아버지가 큰아버지의 정치 자금을 대기 위해 여러 사업을 벌였다고 쓰여 있다.
전남 장성이 고향인 이 전 의원은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란했다. 마찬가지로 전남 장성이 본적인 이 원장은 광주의 조선대와 육군보병학교를 다니는 등 부산과는 연고가 없었다. 그러다 1958년 사하구(당시 서구) 구평동에 있던 한센인 밀집촌 ‘성화원’ 원장을 맡게 됐다. 직전 원장은 민주당 경남도당 선전부장이던 이 전 의원이며, 그 해 국회에 입성했다. 이 원장은 1961년 11월 영화숙 원장으로 취임, 1977년 법인 해산 전까지 운영했다. 영화숙은 1968년 부산시로부터 부랑인 수용 업무를 공식 위탁받은 첫 번째 법인이다. 부랑아 시설인 ‘영화숙’과 부랑인 시설인 ‘재생원’을 합해 한때 최대 약 1200명이 수용됐다.
학계는 이 원장이 이 전 의원의 후광에 힘입어 부산지역 ‘부랑인 비즈니스’의 정점에 설 수 있었다고 보고 있다. 그는 수용인 관리를 위해 시의 보조금과 동시에 외부의 구호물품을 팔아 재산을 쌓기도 했다. 이 원장은 12년간 구호물품을 횡령해 개인 명의의 땅 등을 산 혐의로 1970년 구속된 바 있다.
이 원장에 대해 장남은 “초등학생 때부터 아버지와 떨어져 서울 친척집에서 살아 아는 게 없다. 20대 때 군대에서 전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셔서 본 적도 적다”고 말했다. 차남은 “몸이 아파서 미국에 와 있다”며 취재에 응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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