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식 일 같아서” 일상 제쳐두고 54일간 추모공간 지켰다
참사 이튿날부터 전국서 모여
시민들에 포스트잇 나눠주고
꽃·편지 등 추모물품들 관리
매일 저녁 기도문 왼 할머니
친구 잃은 청소년의 편지 등
가슴을 아리게 한 기억 남아
여모씨는 ‘내일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접한 지난달 11일부터 이날까지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 매일 출근 도장을 찍었다. 자원봉사자 자격으로 이곳 추모공간을 지킨 그는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49재까지 매일 저녁 이곳을 찾아 기도문을 외던 일흔이 넘은 할머니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매일같이 함께 등교했던 친구를 잃은 10대 청소년이 남긴 편지도 가슴을 아리게 했다. ‘나의 모든 순간을 너와 함께한 만큼, 이제 나의 모든 순간에는 너의 빈자리가 느껴질 거야’라는 내용이었다.
다른 자원봉사자는 손에 동상이 걸리기도 했다. 목장갑을 꼈지만 매일같이 추모객들이 놓고 간 꽃을 매만지다 보니 생긴 일이다. “유가족분들은 딱 보면 알아요. 한 남성분은 여기 골목을 말없이 계속 올라갔다 내려갔다 해요.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계시는 분도 있고. 한번은 우는 여성분을 꼭 껴안았더니 ‘감사하다’고 절을 하시더라고요. 그들을 위로할 수 있는 말을 형용할 수 없었어요.”
22일 ‘이태원 10·29 추모공간 시민자율봉사위원회’(시민자율봉사위)가 해산했다. 시민자율봉사위는 참사가 벌어진 이태원 골목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자원봉사자들은 “참사 현장에서 시민들이 애도하는 마음에 이끌려 봉사를 하게 됐고,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정성껏 보살피며 보존해왔다”고 했다. 이들은 “유가족협의회도 생겼고, 49재가 지나고 지역 상권 회복과 국민 화합을 기대하며 1번 출구 추모공간 및 참사 현장 골목에서의 자원봉사 책무를 공식적으로 마친다”고 했다.
시민자율봉사위는 참사 이튿날인 10월30일부터 이날까지 54일 동안 활동했다. 추모공간을 방문한 시민들이 이승을 떠난 희생자들에게 마음을 전할 수 있게 포스트잇을 나눠줬다.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면 포스트잇과 꽃 등 추모 물품 위에 비닐을 씌웠다. 밤이 되면 생화를 지하철 역사 안에 잠시 들여놨다가 아침에 다시 정렬하는 일도 했다.
‘추모 관련 자원봉사자 모집. 010-XXXX-XXXX.’ 참사가 일어난 골목에 인접한 해밀톤호텔 외벽에는 이 같은 문구가 적힌 종이가 붙어 있다. 시민 30여명이 이 번호로 전화를 걸어왔고 이들은 1번 출구 앞에 조성된 추모공간을 지켜왔다. 시민들은 서울은 물론 경기 양주, 경북 영양군 등 전국에서 찾아와 봉사활동을 이어갔다.
이날 기자회견에 나온 자원봉사자 4명은 신상을 끝까지 밝히지 않았다. 다만 일상을 제쳐두고 이곳에 온 이유는 하나였다. “내 자식 일 같다”는 마음이었다. 54일간 이곳을 지킨 A씨는 참사 후 열흘간 야외에서 잠을 잤다. 이후에는 휴업 중인 인근 식당에서 잠을 청했다. 현장 사진은 기록으로 남겼고 시간대별 방문자 수를 헤아리는 일도 맡았다. 그는 추모공간이 정치 싸움의 장으로 변질되는 게 싫었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추모공간 앞에서 정치적 발언을 하는 유튜버들은 쫓아냈다”고 했다. 이 때문인지 우려했던 충돌도 벌어지지 않았다.
22일까지 시민 15만명 방문
꽃 2만5000송이·편지 1만통
추모공간에 남은 것으로 집계
시민자율봉사위는 이날까지 시민 15만여명이 방문했고, 2만5000여송이의 꽃, 2000여개의 추모품, 1만장 이상의 편지가 남겨졌다고 밝혔다. 추모 물품은 지난 21일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와 시민대책회의, 이태원 상인 모임 등에 의해 정리됐다. 유가족협의회와 시민대책회의는 물품을 임시 보관한 뒤 별도의 추모·기억공간이 마련되면 이관할 계획이다.
윤기은 기자 energye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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