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젤렌스키의 깜짝 방미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를 이끄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딱 하루 나라를 비울 기회를 얻어 외국을 방문해야 한다면 그곳은 바로 미국일 것이다. 젤렌스키는 그 카드를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전격 실행했다. 마치 비밀군사작전 같았다. 젤렌스키는 돈바스의 전장 방문 뒤 열차편으로 폴란드로 이동해 미군 수송기 편으로 21일 대서양을 건넜다. 미 전투기들의 호위를 받았다. 미국은 우크라이나와 동맹조약을 맺지는 않았지만 그를 동맹국 정상처럼 예우했다. 워싱턴에서 연말에 외국 정상을 맞이하는 일은 흔치 않다.
왜 지금일까. 그것은 젤렌스키의 미 의회 연설을 보면 알 수 있다. 젤렌스키는 “미군이 대신 싸워주길 기대하진 않는다”며 “다만 무기가 충분치 않으니 군사적 지원을 더 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우리도 곧 크리스마스를 축하할 것이다. 촛불을 켠 채로. 그게 낭만적이어서가 아니라 전기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군사·경제·인도적 지원 패키지로 이뤄진 약 450억달러 규모의 대우크라이나 원조 예산안이 미 의회에서 논의되는 것을 겨냥한 발언이다.
내년 공화당이 하원 다수당으로 회기를 시작하면 미국이 올해처럼 우크라이나를 지원할지 장담할 수 없다. 평화협상의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한 뼘의 땅이라도 더 회복해야 하는 젤렌스키로서는 워싱턴을 움직이는 게 절실했다. 젤렌스키는 미국인들을 향해 “당신들의 돈은 기부가 아니라 세계 안보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자”라고 호소했다. 그의 연설은 81년 전 2차 대전 당시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의 연설을 모방했다. 처칠은 1941년 12월26일 나치 독일과 싸우던 유럽인들을 대표해 미 의회에서 연설했고, 미국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81년 전과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르다. 일본의 공격을 받고 즉시 참전했던 당시와 달리 지금 미국의 국론은 갈라져 있다. 공화당 하원의원 3분의 2가 젤렌스키 연설에 불참한 게 이를 보여준다. 또 당시 미국은 뜨는 강대국이었지만, 지금은 정점을 찍고 내려가는 중이다. 미국의 참전에도 불구하고 당시 전쟁이 종료되기까지 3년 반 이상이 더 걸렸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남은 기간이 81년 전보다 훨씬 짧기만을 소망한다.
손제민 논설위원 jeje1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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