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맑실 칼럼] 도서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강맑실 | 사계절출판사 대표
대학 시절 도서관에서 내 자리는 늘 창가였다. 출입문 쪽으로 등을 돌리고 도서관에서 대출한 두꺼운 전공 서적들을 칸막이 삼아 오른쪽에 쌓아두면, 왼쪽은 창 쪽으로 트인 나만의 오롯한 공간이 생겼다. 창은 남학생 기숙사로 이어지는 샛길로 나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의 사분대는 발소리가 책 읽는 걸 방해하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예외는 있었다. 뒤꿈치를 살짝 끄는 듯한 신발 소리가 들리면 집중력은 깨지고 가슴이 뛰었다. 책을 빌릴 때 대출카드에서 신발 소리의 주인공 이름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반가움에 마음까지 떨리곤 했다.
지금은 대부분의 도서관이 폐가식에서 개가식으로 변했다. 신분이 확인되면 카드발급기에서 대출카드가 지급된다. 무선주파수인식(RFID) 리더기라는 인식기에 빌릴 책들을 쌓고 그 위에 대출카드를 올리기만 하면 모든 내용이 컴퓨터에 동시에 저장된다. 반납할 때도 마찬가지다. 무인대출반납기까지 등장했다. 서울시의 경우, 시민카드 앱을 이용하면 각 도서관의 대출회원증을 앱카드로 받을 수 있다. 책을 빌린 사람들의 각기 다른 필체가 빌린 순서대로 세월 따라 고스란히 남아 있던 종이 대출카드는 이제 낭만적 유물이 되어버렸다.
학창 시절 학교도서관은 책 대출 기능보다는 공간 대여 기능이 훨씬 컸다. 1990년까지 전국에 119곳에 불과했던 공공도서관 역시 일반열람실에서 공부하려는 학생들로 아침부터 장사진을 이뤘다. 이제는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도서관 수가 늘었다. 2000년을 전후로 각 지방자치단체를 대표하는 대형 도서관과 소규모 도서관 건립 계획이 속속 발표되면서 2022년 현재 1213개 공공도서관이 운영 중이다. 2000년대에 접어들어 도서관 건립을 위한 시민운동까지 활발해지면서 작은도서관도 2021년 말 기준 사립과 공립을 합해 6448곳이 운영되고 있다. 도서관의 역할 또한 독서실과 책 대출 기능에서 벗어났다. 책과 연관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웹툰용 태블릿, 유튜버를 위한 1인 미디어실 등 최신 트렌드를 반영한 시설들을 갖춘 메이커스페이스의 역할까지 해내고 있다. 도서관 수를 넘어 이제는 도서관을 어떻게 운영하느냐가 핵심 과제가 되었다.
코로나 직전까지 우리나라 도서관 이용객 통계를 보면 중대형 공공도서관보다 작은도서관 이용률이 증가하고 있었다고 한다. 집에서 가깝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것뿐일까.
작은도서관은 말 그대로 작다. 면적 10평 이상, 좌석 수 6석 이상, 자료 1천권 이상이면 작은도서관의 자격을 부여받는다. 주로 동사무소나 교회, 공원, 복지관 등의 한쪽에 자리 잡고 있다. 작기에 사랑방처럼 책을 중심으로 한 사람들의 네트워크가 활발하다. 작은도서관은 책과 더불어 사람 중심으로 변하고 있다. 조용하고 정적인가 하면 시끄럽고 왁자지껄한 곳이 작은도서관이다. 사람 사이 벽을 허물고 가족 밖 진정한 공동체를 만들어나가는 곳, 도서관의 주인인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지역공동체를 일구어가는 곳이 작은도서관이다.
이 모든 순기능은 사서나 관장이 있을 때 더욱 큰 시너지를 낼 수 있다. 하지만 지자체는 예산을 절감한다는 명목으로 사서를 두지 않거나 두더라도 삼분의 일 가까이가 비정규직이다. 순회 사서나 자원봉사자가 작은도서관을 서너개씩 맡아 이삼일에 한번 방문해 책을 관리하기도 한다. 이 경우 책 대출 기능만 겨우 이어갈 수 있을 뿐,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도서관 기능은 기대하기 어렵다.
얼마 전 서울 마포구 한 복지관에 자리한 작은도서관을 방문했을 때 마침 자원활동가 한분이 장애인 이용자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고 있었다. 아카바 수에키치의 <수호의 하얀말>이었다. 내용을 알아듣는 이용자는 이용자대로 질문에 씩씩하게 대답했고, 내용을 몰라도 읽어주는 이의 억양만으로 감정을 느끼며 울기도 웃기도 하는 이용자도 있었다. 자원활동가는 최근 결성된 ‘마포구립 작은도서관을 지키는 사람들’의 4인 공동대표 중 한분이었다. 11월 초, 마포구청이 위탁 심사까지 통과한 기존 위탁법인과 계약을 해지하면서 기존 담당 사서의 고용까지 해지하려고 하자 결성된 모임이었다. ‘국공립 작은도서관은 사서 1명 이상을 둘 것’이라는 도서관법 시행령(12월8일부터 시행)에도 반하는 정책이었다.
주민들은 작은도서관들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바로 도서관을 지키는 주민 모임을 결성했고 그러한 방침의 부당성에 항의했다. 그 결과 9개 작은도서관 중 8개는 기존 위탁처와 재계약해 3년 동안 현행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도서관은 주민이 낸 세금으로 운영된다. 주민이 진정으로 원하는 곳에 예산을 제대로 쓰고 있는지 살피고 감시하는 건 주민의 주권이자 권리가 아닐까.
사서와 관장이 없거나 순회 사서에게 여러개의 작은도서관 관리를 맡길 경우, 도서관의 앞날은 불을 보듯 뻔하다. 도서관법 시행령에도 불구하고 지자체 곳곳에서 이런 움직임은 여전히 감지되고 있다. 사서가 없는 작은도서관이라 하더라도 자원봉사자와 활동가들의 열정과 헌신으로 지역 밀착형 도서관의 역할을 잘해내고 있는 곳도 물론 있다. 하지만 이분들의 열정과 헌신에만 기댈 경우 도서관의 동력과 에너지는 오래갈 수 없다. 도서관을 새로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공립이건 사립이건 지금 있는 작은도서관의 인건비와 예산과 시설을 늘리는 일이다. 실제로 몇몇 지자체는 도서관 예산을 늘리고 작은도서관들을 활성화해 주민들의 큰 호응을 얻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네의 사회적 가치도 한껏 높이고 있다. 이사 갈 때 인구 10만명당 도서관 수를 따지는 학부모들도 늘고 있다. 뭐든 돈으로 계산하고 허황된 잣대를 들이대면서 엉뚱한 값을 매기는 행정가들의 눈에 이런 무형의 사회적 가치는 결코 보이지 않으리라.
<도서관은 살아 있다>의 저자는 ‘세상에서 가장 인간적인 도서관’으로 미국 시애틀 중앙도서관을 꼽는다. 이 도서관은 노숙인은 물론 어린이, 노인, 이민자, 소수인종, 실업자, 저소득층, 정보소외 계층, 성소수자 등 공동체 구성원 모두를 섬기고 돌보는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이는 1998년 ‘모두를 위한 도서관’이란 기치를 내건 시민투표를 통해 가능한 일이었다고 한다. 도서관의 역할과 운영이 이용자인 시민들을 위해 시민들과 더불어 어떻게 진화해야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공공도서관은 차별과 빈부격차와 편견으로 가득 찬 이 사회에서 평등과 공공성과 국민의 주권을 담보하고 있는 최후의 보루 같은 곳이다. 남미 작가 보르헤스는 도서관에서 얻는 즐거움이 얼마나 크고 평화로웠으면 낙원은 도서관처럼 생겼을 거라 상상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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