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은 거대한 인간 도서관
[삶의 창]
[삶의 창] 이명석 | 문화비평가
나는 대학교를 좋아한다. 인공지능이 장소별로 분류한 여행 사진들을 보며 새삼 깨닫는다. 전주에서 한옥마을을 찍은 사진은 열장도 안 되는데, 전북대의 풋풋한 농장과 텃밭은 백장도 넘게 찍었다. 일본 홋카이도에서도 오타루 운하의 예쁜 건물들보다 홋카이도대학교를 훨씬 좋아했다. 거대한 느릅나무 숲, 공룡 모형이 있던 박물관, 유제품이 특별했던 카페테리아, 만화 <닥터 스쿠르>에 나오는 수의과 대학 농장까지 샅샅이 돌아다녔다.
여행지의 지도를 펼치면 대학교부터 찾고 근처에 숙소를 정하는 경우도 많다. 캠퍼스 안 느긋한 산책길, 유서 깊은 건물, 저렴한 구내식당만 좋은 게 아니다. 교문을 나서면 작은 책방, 레코드숍, 중고 옷가게들이 기다리고 있다. 취향과 실리, 거기에 심리적인 이유를 더해야겠다. 살벌한 도심과 달리 대학가는 외지의 여행자들에게 개방적이다. 야외 카페에 앉으면 학생들이 말을 걸어오고, 간혹 합석해 서로의 호기심을 채운다. “혹시 오늘 저녁에 계획 있어?” 그 친구들의 작은 공연이나 파티에 초대받기도 한다.
샌프란시스코 인근 버클리대학교에서는 느긋함이 과했다. 햇살 좋은 잔디밭에서 잠시 쉬어가려다 1시간 넘게 꿀잠을 자버렸다. 커피라도 마시려 인터내셔널 하우스라는 건물에 들어섰는데 이곳의 유래를 보여주는 전시에 발이 멎었다. 1909년 해리 에드몬즈는 컬럼비아대 도서관 앞에서 중국인 학생에게 ‘굿모닝’이라고 인사했다. 상대는 무척 놀랐다. “뉴욕에 3주 동안 있었는데, 말을 걸어온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에드몬즈는 서로 다른 국가와 인종의 학생들이 함께 살면 경계와 편견이 사라질 거라 여겨, 뉴욕에 이어 버클리대에 인터내셔널 하우스라는 다국적 기숙사를 열었다.
1930년 문을 열 때, 캘리포니아의 주민들은 지금처럼 개방적이지 않았다. 남자와 여자, 백인과 유색인종은 한지붕 아래 살 수 없다며 반대하기도 했다. 세계대전과 끝없는 분쟁은 에드몬즈의 이상에 시비를 걸어왔다. 그럼에도 이곳은 꿋꿋이 세상 곳곳의 학생들을 받아들였다. 진주만 침공 직후엔 일본계 학생들을 불러 모았고, 티벳 난민이 중국계 학생들과 대화하게 했고, 보스니아를 떠난 학생이 안전과 배움의 기회를 얻도록 했다. 미 <공영방송서비스>(PBS) 다큐멘터리에서 한 학생은 말한다. “여기 함께 살던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학생이 30년 뒤 대통령이 되어 협상 테이블에 앉으면 많은 게 달라질 거예요.” 이 기숙사는 85개국 이상 국가 시민들이 모인 작은 유엔의 역할을 한 셈이다.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한국에서 이런 기숙사를 연다면 대학생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익명 커뮤니티에 이런 글들이 올라올지도 모른다. 왜 우리 세금으로 외국인들을 가르쳐? 한국어도 잘 못하는 애들 때문에 강의 질이 떨어지면? 빈곤국 출신이나 난민? 여기서 학위 따고 눌러앉으면 우리 일자리를 뺏는 거잖아. 게다가 이상한 옷 입고 자기들 종교 퍼뜨리면 어떻게 해.
인터내셔널 하우스는 기숙사생들만의 기회가 아니었다. 일반 학생들 역시 그들과 어울리며 새로운 문화, 언어, 생각들을 접했다. 버클리대는 개방적인 학풍으로 유명해졌고, 미국에서 처음 한국사 강좌를 개설하기도 했다. 인류학자 로렐 켄달은 버클리대를 졸업하고 평화봉사단으로 한국에 온 뒤 수십년 동안 한국의 무속신앙을 연구해왔다. 그 기숙사는 세상에서 가장 다양한 정신들이 교류하는 대학교를 만들었다.
외국인, 농어촌, 장애인, 북한이탈주민 등 대입 특별전형을 두고 볼멘소리들이 들린다. 하지만 그들에게 주는 시혜가 아니라 그들로부터 얻는 다양성에 주목해 보자. 대학은 거대한 휴먼 라이브러리다. 갖가지 인종, 문화, 경험의 휴먼북들이 어우러지는 곳. 나는 그런 대학교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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